"독일은 하나" 베를린 곳곳 민족재건의 굉음1989년 11월 9일 동서독 분단의 상징인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1945년 포츠담 선언으로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등 4강에 의해 강제 분할됐던 독일은 1990년 10월 3일 마침내 역사적인 통일을 이루어 냈다.
45년에 걸친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을 이룩한 게르만 민족은 그동안 1970년 3월과 5월 역사적인 동서독 정상회담 등을 거쳐 상호 교류를 통해 신뢰감을 회복하면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전진시켜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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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의 영웅 브란트
유구한 민족정신, 문학과 예술 및 종교 등의 깊은 뿌리는 통일의 밑거름이 되었으며 통일 이후에도 이질적인 동서독 국민들을 이어주는 가교가 됐다.
오는 12-14일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독일의 현주소와 통일의 정신이 깃든 도시, 특히 첫 동서독 정상회담이 열렸던 도시들을 살펴보고 그 교훈을 찾아본다.
독일인들에게 통일은 이미 옛 이야기가 됐다.
독일 분단의 계기가 됐던 포츠담이나 통일 수도인 베를린에서 만나는 시민들은 통일을 마치 먼나라의 사건으로 치부하는 듯하다.
1961년 만들어 져 베를린을 동서로 가로질러 놓았던 장벽들은 1989년 모두 제거됐으며 단지 찰리 검문소 인근에 기념사진 촬영용으로 일부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통일이 된지 10년이나 지난 현재 게르만인들에게 통일은 역사적 기록일 뿐 민감한 현실로 다가오지 않는다.
하지만 포츠담에서 근교열차인 에스 반(S-Bahn)으로 20여분 밖에 걸리지 않는 베를린을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기까지는 45년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베를린 하우프트반호트(중앙역)에서 포츠담 하우프트반호프를 10여분마다 오가는 에스 반은 출퇴근 시간대면 사람들로 만원이다.
포츠담은 유네스코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탓인지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포츠담 중앙역에서 버스로 20여분 떨어진 슐로스(城) 체칠리엔호프궁에서 1945년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윈스턴 처칠 영국 총리, 스탈린 소련 공산당 서기장, 해리 트루먼 미국 부통령은 2차대전 이후 처리문제를 논의하면서 독일의 분할 통치를 선언했다.
슐로스 체칠리엔호프는 전체가 고급호텔로 변했으며 당시 회담장만이 그대로 보존되고 있다. 호텔 관계자는 “관광객들 중 이 곳이 포츠담 선언을 한 곳이라고 아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말한다.
슐로스 체칠리엔호프 호텔의 잘 꾸며진 정원은 산책과 휴양을 하기에 최고급 수준이다. 전세계 VIP들도 휴가때면 이 곳에서 묶을 정도로 이름이 알려졌다.
관광객들중 대부분은 그러나 슐로스 체칠리엔호프궁 보다는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왕이 실았던 상수시궁을 보러온다.
시민들도 포츠담 선언을 했던 곳을 잘 알지 못하고 상수시 궁의 웅장함을 자세히 설명한다. 포츠담 중앙역에서 근무하는 빌헬름 잉거씨는 “포츠담에서 옛 동베를린 지역의 역까지 열차들이 운행하는 모습을 보면 가끔씩 통일이 실감난다”며 “그러나 현재는 통일 당시의 감격은 사라졌고 늘어나는 교통량을 어떻게 처리하느냐가 고민”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베를린이 통일 독일의 수도가 된 이후 베를린 외곽 도시인 포츠담은 교통이 매우 혼잡할 정도로 붐비고 있다.
본에서 독일 정부와 의회가 이사를 오고 기업들도 본사를 이전함에 따라 베를린의 인구는 점점 불어나고 있다.
베를린너(베를린시민)들은 이 때문에 도시 외곽지역으로 이사, 출퇴근 시간대는 각 열차역이나 지하철역에 정신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오간다.
비교적 주거공간으로 여유가 있는 옛 동베를린 지역은 아직도 제대로 개발이 되지 않고 있다. 소련식으로 지은 아파트들과 호텔, 상가 건물 등을 재개발하고 있으나 옛 서베를린 사람들은 좀처럼 ‘동쪽’지역에 들어가기를 꺼려한다.
베를리너 모르겐 포스트의 시청 출입 기자인 피터 한스는 “동베를린 지역에서는 범죄가 자주 일어나는 등 주거환경이 아직도 좋은 편이 아니다”라면서 “아직도 심리적, 경제적 차이가 상존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브란덴부르크문와 제국의회 등 시내 중심가 중요 건물의 옥상에는 독일 국기가 힘차게 펄럭이면서 통일을 상징적 보여주고 있다. 또 2차대전때 연합군의 공습으로 파괴된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도 그대로 보전되고 있다.
이같은 건축물들은 통일에 따른 이질감을 없애주고 베를린 시민들에게 ‘하나의 민족’이라는 의식을 불어 넣고 있다. 제국의회 주변에는 대대적인 공사가 진행중이며 장벽때문에 지나갈 수 없었던 프로이센 왕국의 개선문 브란덴부르크문은 넘쳐나는 교통량으로 내년부터 출입이 제한된다.
교통량이 늘어나자 최근에는 벨로택시(자전거 수레)로 이들 주요건물을 둘러보는 관광상품도 개발돼 인기를 끌고 있다.
1990년 통일이후 게르만들은 오히려 분단의 시기보다 더 어려움을 겪어야만 했다. 그럼에도 불구, 빈부 격차, 이념의 차이, 통일비용에 따른 고통 등을 극복한 게르만들은 민족의 동질성을 찾아 ‘하나’가 되고 있다.
‘하나의 민족’이라는 의식은 바로 세계적인 문호 괴테, 음악의 아버지 요한 세바스찬 바하, 종교 개혁의 선구자 마르틴 루터 등으로 이어지는 유구한 역사적 전통과 정신적 문화유산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덴마크, 오스트리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기념해 베를린 중심에 우뚝 세워져 있는 전승기념탑 지게스조이레는 독일의 힘과 정신을 말없이 증명하고 있다.
베를린·포츠담=이장훈기자
truth 21@hk.co.kr
■독일 통일의 영웅 브란트
"자주마난면 변한다" 통독 큰길 열어
베를린 슈트레제만 스트라세 28에 위치한 빌리 브란트 하우스. 사민당(SPD)의 지부도 겸하고 있는 현대식 7층 건물의 맨 아래층에는 통일의 영웅 브란트 전 서독총리를 기념하는 동상이 전시되어 있다. 이 곳에서는 그를 기념하는 각종 세미나와 전시회 등이 열린다.
이 건물의 한 관리인은 “세계적인 지도자들이 브란트 하우스를 방문, 그의 업적과 정신을 되새긴다”고 말했다.
서베를린 시장을 역임했던 브란트는 1992년 10월 17일 베를린에서 독일 통일이후 첫 국장으로 장례를 치르는 영광을 안고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베를린 장벽이 세워지는 분단의 현실을 몸으로 경험한 브란트는 1969년 10월 집권하자 마자 야심에 찬 ‘동방정책’을 추진했다.
그는 분단후 25년만인 1970년 3월 19일 구 동독 국경도시 에어푸르트와 5월 21일 구 서독 국경도시 카셀에서 빌리 슈토프 전 동독 총리와 처음으로 두차례 동서독 정상회담을 가졌다.
그는 이어 1971년 소련과의 불가침 조약 체결 등 통일의 대장정을 위한 발판을 마련했다. “조금씩 가까워 지면서 변화를 촉발한다”는 신념으로 동독과의 화해와 교류에 노력했던 그에게 전세계는 1971년 노벨평화상을 주면서 응원을 했다.
그는 이후 1972년 동서독 통행협정 및 기본조약을 체결했고 1973년 유엔에 동서독이 동시 가입토록 하는 등 게르만의 민족적 일체성을 다져 나갔다.
동서독은 브란트의 이같은 노력으로 1990년 통일이 될 때까지 모두 9차례의 정상회담을 가졌다.
브란트는 생전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현장을 바라보면서 감격의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그의 장례식은 통일된 독일의 단합을 상징하는 제국의회에서 슈베르트의 미완성교향곡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거행됐다.
당시 독일은 통일의 후유증을 심하게 앓고 있어 이 ‘미완성’이라는 단어가 듣는 이들의 가슴을 저리게 했다. 그러나 브란트가 자신의 회고록 말미에 “다시는 아무것도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되지는 않을 것”이라고 적었듯이 독일의 통일은 ‘완성’됐고 과거로의 회귀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장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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