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정상회담이 가까워지면서 부쩍 선친 생각이 난다. “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를 자주 부르던 평남 성천 출신의 아버지.월남 당시 아버지는 할아버지께 “일주일 안에 돌아올테니 아무 염려마시라요”라고 인사드린 뒤 나와 누나를 업고 친척 몇분과 남으로 내려왔다. 월남후 잠시 전투경찰에도 투신했던 아버지는 전주와 서울을 전전하다 통일이 되면 고향에 가장 먼저 달려가겠다며 눈이 펑펑 쏟아지던 1957년 2월 이곳 철원으로 이사했다. 아버지는 신문지국 운영, 면서기, 행정대서사 등을 하면서 어렵게 우리 육남매를 키우면서도 항상 고향을 그리워했다.
아버지는 KBS의 이산가족찾기 방송에서 가까스로 당신의 이모님과 외숙부님을 찾고는 그리 좋아할 수 없었다. 이미 노인이 된 외숙부님은 철원까지 찾아와 어머니를 껴안고 눈물을 쏟았다.
한번은 귀순 용사가 찾아와 강연을 한 적이 있는데 그는 우연히도 아버지와 같은 고향 출신이었다. 아버지는 너무도 반가운 나머지 강연 도중 무대에 올라가 그를 껴안고 눈물을 흘렸으며 다시 집으로 초대, 점심을 대접하기도 했다. 그러던 아버지는 지금 산세가 고향과 비슷한 경기 포천군 관인면 산골에 누워 계신다.
이젠 혼이나마 고향에 돌아가셔서 먼저 가셨을 할아버지 할머니 친지들과 상봉하셨겠지하고 위안을 해본다. 그러면서도 아버지가 생전에 고향 땅을 밟았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아쉬움을 지울 수 없다.
나도 이런 아버지의 영향을 적지않게 받았다. 지방 공무원으로 여러 읍·면에서 근무한 적이 있는 나는 마을에 출장갈 때마다 평안도 사투리를 쓰는 사람들에게 “저는 성천에서 태어났는데요, 어르신 고향이 어디신가요”라고 물었다. 호적부를 뒤질 때도 원적지가 성천 분이 없나하고 살펴보곤 했다.
혈육의 생사조차 모른채 돌아가신 분이 어디 우리 아버지뿐이겠는가. 생생하던 청년으로 내려온 이북내기 어른들은 이제 거의 북망산에 묻히고 남은 분들 도 날로 쇠잔해지고 있다. 기다리다 지치고 생이별의 고통과 망향의 한을 품고 살아온 그들. 돌아가시기 전에 하루라도 빨리 그리던 고향 땅을 밟을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아울러 나도 고향을 한번만이라도 가보고 싶다.
/최춘명 강원 철원군 철원읍 화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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