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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보훈대상 수상자 얼굴/상이군경부문 임병옥씨 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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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보훈대상 수상자 얼굴/상이군경부문 임병옥씨 外

입력
2000.06.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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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보훈대상 수상자 얼굴] 상이군경부문 임병옥씨 월남전 다리부상극복 봉사활동임병옥(林炳玉·56ㆍ전상군경 2급)씨는 1967년 베트남 투이호아 전투에서 총상으로 한쪽다리를 잃고 명예제대하면서 인헌무공훈장을 받았다.

한때 좌절감에 빠지기도 했으나 1970년 수원보훈지청으로부터 10만원을 지원 받아 구멍가게를 시작, 성치 않은 몸으로 쌀과 연탄을 배달하면서 자립의 기틀을 마련했다. 임씨는 이어 파인애플 재배의 성공으로 71년 당시 연간 100만원이 넘는 소득을 올리는 성과를 보인 뒤, 새마을사업과 주민계몽활동에 뜻을 두었다.

임씨는 경기 수원시를 무대로 농촌계몽과 지역사회봉사를 전개함과 동시에, 불우이웃 돕기와 경로위안잔치, 재소자 방문 등의 사회활동을 꾸준히 실천했다. 또 대한해외참전전우회 활동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고 태권도 사범출신으로서 수원시 생활체육협의회 사무국장을 맡아 생활체육 보급 및 프로그램 개발에 크게 기여했다.

94년부터는 경기도 향토노래보급운동 봉사단을 창단하여 향토노래를 제작, 보급하고 있으며 대통령 표창, 문화체육부장관 표창, 경기도지사 표창 등 수많은 수상으로 사회활동을 인정받았다.

■[한국보훈대상 수상자 얼굴] 미망인 부문 박성희씨

남편전사 여섯식구생계 책임져...

박성희(朴性熙·77)씨는 6.25 발발과 함께 입대한 남편을 2개월만에 낙동강 전투에서 잃은 뒤 시부모와 두 아들, 시누이까지 여섯 식구의 생계를 행상을 하면서 책임져왔다. 또 아들의 전사소식에 중풍으로 쓰러진 시어머니를 8년, 이후 시아버지를 2년간 지극한 정성으로 수발했다.

1962년 보훈청의 알선으로 대한방직 작업부에 취직, 안정된 생활을 시작하는가 했으나 65년 목숨같이 의지하던 큰아들마저 군복무중 순직했다.

박씨는 자신의 기구한 운명을 비관하며 죽음을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고통을 신앙으로 극복하고 직장내 동료 미망인들의 인생 상담을 해오다 92년부터 포항 미망인경로당 회장으로 전쟁 미망인을 돕는데 여생을 바치고 있다.

알뜰한 살림으로 포항시내에 싯가 20억원 상당의 상가 및 주택을 보유하고 있으며 88년 아들 정태준(인도네시아 현대 위칸타라메타 대표이사)씨를 훌륭히 키운 공로로 포항 향토청년회로부터 제1회 장한 어머니상을 수상했다.

33년간 한 직장에 근무한 아들 정씨는 5년의 해외근무기간동안 한번도 귀국하지 않고 회사와 나라를 위해 헌신, 10차례 모범사원 표창을 받았다.

■[한국보훈대상 수상자 얼굴] 중상이 배우자부문 권호남씨

하반신마비 남편수발에 혼신

권호남(權鎬男·64)씨는 휴전을 앞둔 1953년 5월 휴가중이었던 남편(육군 이등중사 최일환)과 혼례를 치렀다. 하룻밤을 함께한 후 떠난 남편은 경기 포천지구 전투에서 총상을 입어 척추장애로 인한 하반신 마비의 불구로 돌아왔다. 1년만에 나타난 남편의 모습은 19세의 어린 새 색시에게 크나큰 충격이었다.

그러나 권씨는 곧 절망과 슬픔에서 벗어나 극진한 간호와 기도를 시작했다. 그는 혼자서는 앉지도, 눕지도 못하는 남편의 용변을 받아내며 함께 아파하면서도 막내며느리로서 시부모 공양과 집안 일을 소홀히 할 수 없어 두 몸, 세 몸의 역할을 해냈다.

험한 산을 헤집고 약초를 캐고 뱀과 독지네 달팽이를 잡아 약으로 쓰는가 하면 500집에서 쌀 한줌씩 얻어 떡을 해 나누어 먹으면 병이 낫는다는 소리를 듣고 온갖 박대를 받으며 동냥을 다니기도 했다.

결국 남편의 치료를 포기한 후에는 보상금과 파출부로 모은 돈을 조카들의 교육에 쏟아 붓고 남편이 두차례 사업 실패로 방황할 때도 사회생활을 포기하지 않도록 격려, 주위를 감

동시켰다. 남편이 부산 용사촌 회장으로 재직할 때는 26개 용사촌 중 가장 소득이 높은 용사촌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내조를 했다.

■[한국보훈대상 수상자 얼굴] 유족유자녀부문 진태준씨

아들둘 사망후 장학회.무료진료

진태준(秦泰俊·75)씨는 제주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1961년 36세때 독학으로 한의사의 꿈을 이뤘다. 그러나 73년 육남매 중 고등학교 2학년이던 둘째 아들을 심장마비로 잃은 데 이어 78년 육군 6사단 소속이던 장남까지 불의의 사고로 떠나보내 실의와 비통에 빠졌다.

진씨는 나라를 위해 큰 인물이 되겠다던 두 아들의 뜻을 살리기 위해 동연 장학회를 설립, 지금까지 57명의 의학도 또는 형편이 어려운 학생에게 4,000여만원을 지급했다.

또 30년간 제주도내 농어민, 복지시설 수용자, 환경미화원, 불우학생, 보훈가족 등을 대상으로 순회 무료 진료를 실시, 8,000여명이 혜택을 입었다. 특히 직업상 무좀이 심한 환경미화원 500여명을 치료하고 한창 공부할 나이에 축농증으로 정신집중이 되지 않아 고민하는 학생들에 관심을 갖고 치료한 일은 널리 화제가 됐다.

수세기 동안 전해 내려온 제주도의 민간요법을 정리하여 ‘제주도의 민간요법’ ‘건강과 민간요법’‘학이 날고간 자리’‘인술은 멀고’등의 책을 펴냈다. 지난 수년간 심장질환으로 3차례 대수술을 받았지만 고령을 무릅쓰고 다시 봉사활동을 시작하고 있다.

■[한국보훈대상 수상자 얼굴] 특별보훈부문 곽선부씨

부모옥사 월남후 선열추모 전념

곽선부(郭仙富·72)씨는 3ㆍ1 독립만세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한 후 무장 독립운동을 하다 체포돼 옥사한 곽치문·박치은 부부의 막내. 부모가 옥고를 치르는 동안 4자매 중 2명이 사망하고 가정이 파괴되는 극한 상황을 넘긴 그는 1948년 김일성대학 재학 중 사회주의 체제에 회의를 느끼고 월남, 독립 유공자 후손의 긍지를 잃지 않고 꿋꿋이 살아왔다.

1963년 연사 제조업을 시작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기면서부터는 남편과 일본 교도(共同)신문 한국지사를 운영하며 재일동포 북송 저지 운동을 펴고 재일동포와 국민들에게 자유민주주의의 우월성을 알리는데 힘썼다. 77년에는 ‘한일독립 운동비사 대한독립 대동청년단 사건’을 자비로 편찬하고 84년 애국지사 숭모회를 조직해 회장으로서 17년째 이끌고 있다.

3ㆍ1 여성독립운동가 후손 20명에게 장학금을 지급하고 91년 여성독립운동가 조신성 여사의 묘소를 찾아내 대전국립묘지로 옮기는 천묘행사를 주관하기도 했다. 96년부터는 한민족여성연합회 총재로 일하며 세계에 흩어진 한민족 여성의 단합과 한민족 전통문화 계승에 기여하고 있다. 올 2월에는 독립군가를 후손에 보급하기 위해 애국지사 숭모회 합창단을 창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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