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해 일본 출판계는 놀랄 만한 업적을 세웠다.지난 해 1월 20일 출간된 일본어 글쓰기 교본인 ‘일본어연습장(日本語練習帳)’이 무려 165만 권이나 팔려나간 것이다.
올해 81세의 일본어 학자인 오노 쓰스무(大野晋)가 지은 이 책은 35주 동안 비소설 부문 1위를 지키더니 연말 집계에서도 ‘오체불만족’에 이어 2위(종합)를 기록했다.
일본 언론은 흥분했다. ‘마침내 모국어 사랑이 승화했다’는 자아도취도 있었고, e메일 이용의 확산에 따른 자연스런 창작 욕구 때문이라는 분석도 나왔다.
‘당신의 일본어 실력을 연마시켜주는 30권의 책’이라는 특집 기사도 연재됐다. 이 책을 출간한 이와나미 서점 관계자는 “20세기 들어 이 책만큼 독자들에게 사랑 받은 책도 없을 것”이라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러면 우리는? 일상생활에서는 물론 최고 교육을 받은 이들이 즐비한 학계, 법조계, 언론계, 경제계, 의학계 등에서도 비문(非文)과 부정확한 문장이 난무하는데도 누구 하나 글쓰기 교본을 사서 볼 생각을 안한다.
아니, 온 국민이 애독하고 애송할 수 있는 믿을 만한 교본 자체가 없다. 그 사이 우리 글은 점점 퇴화하고 명문(名文)은 사라져만 간다.
1968년 제정된 ‘국민교육헌장’에 대한 서울대 국어국문학과 이익섭 교수의 혹독한 비판을 보자.
“나라에서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고치고 다듬어 만든 글이 어떻게 그렇게 모호할 수가 있나? ‘성실한 마음과 튼튼한 몸으로,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히며, 타고난 저마다의 소질을 계발하고, 우리의 처지를 발판으로 삼아, 창조의 힘과 개척의 정신을 기른다’는 이 헌장은 과도한 쉼표의 사용에 도대체 무엇을 어떻게 하자는 것인지 모르겠다.”
물론 우리에게도 월북 소설가 이태준(1904~?)의 ‘문장강화’라는 아름답고 훌륭한 교본이 있었다.
1948년 출간된 이 책은 ‘인현왕후전’에서 ‘표본실의 청개구리’까지 120개가 넘는 풍부한 예문을 통해 훌륭한 우리 글의 표준을 제시한 걸작이었다.
문장 작법의 의의, 서간문 기행문 추도문 등 각종 문장 쓰기 요령과 묘사·표현·문체의 문제 등이 실려 왜 ‘시에는 정지용, 소설에는 이태준’이라는 말이 생겼는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명문과 우리 글 사랑이 가득하다.
하지만 ‘문장강화’ 이후 모든 것이 끊겼다. 우리 글에 대한 관심도, 이러한 교본에 대한 애정도. 민음사 편집장 장은수씨의 지적은 매우 신랄하다.
“최근까지 각종 띄어쓰기와 맞춤법, 문장 작법에 관한 책들이 쏟아져 나오기는 했지만 대형 서점 서가에 그냥 꽂혀 있을 뿐이다. ‘일본어 연습장’과 같은 베스트셀러를 꿈꾸는 당신의 바람은 허망할 뿐이다.
‘문장강화’가 당시 일본어 오염에 대항한 바른 글쓰기 교본이었다면, 이제는 영어 오염에 대항할 수 있는 아름답고 정확한 교재가 나와야 한다.”
그러면 왜 ‘아름답고 정확한’ 우리 글쓰기 교재가 나오지 않는 것일까? 이익섭 교수는 그 이유로 전문가의 부족을 꼽는다. “‘문장강화’ 이후 전문성이 없는 책들만 나왔다.
겨우 초등학교 학생들의 글짓기를 대상으로 하면서 전문가 행세를 하는 일이 너무 많다. 법정 스님의 글같은 좋은 문장을 찾아내려는 노력의 부족, 여기에 글쓰기에 모범을 보여야 할 사람들의 나쁜 글 양산이 우리의 열악한 현실이다.”
국립국어연구원 허철구 학예연구원의 견해는 약간 다르다. “교재는 쌓여있을 정도로 많다. 물론 너무 경직된 책들도 많지만, 우리 글에 대한 애정을 갖고 오늘도 밤을 새는 학자들은 더 많다.
문제는 독자들의 관심이다. 제대로 글을 쓰지 못하면서도 글쓰기 교본은 거들떠 보지도 않는 게 현실 아닌가?”
결국 일반 독자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전문가가 지은 교본이 나와야 한다는 얘기다.
명문을 가려 뽑은 풍부한 예문과, 사소한 문법과 띄어쓰기에도 주의하는 교재. 일기와 서간문, 논설문, 심지어 추도사까지 그 준범을 제시해줘 어린 학생부터 회사원까지 필요할 때마다 들추어 볼 수 있는 그런 당당한 독본. 당대 최고의 문장력을 인정받으며 많은 팬을 갖고 있는 소설가 이문열씨의 견해는 그래서 궁금해진다.
“예전 국어 교과서에는 그래도 명문이 많았다.
정비석의 ‘산정무한’이나 박태완의 ‘천변풍경’은 참으로 좋은 글들이었다. 하지만 요즘 국어 교과서는 그렇지 않은 것 같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이 초등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는 했지만, 내 글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내 글에는 인도유럽어의 번역체, 한문의 번역체, 한글체, 일상의 구어체가 서로 충돌하고 있다. 지금 당장이라면 피천득과 김진섭의 수필이 글쓰기 교재로 합당할 것으로 보인다.
내 자신도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 지금보다 훨씬 많이 글을 쓴 다음에는 꼭 한 권의 글쓰기 교재를 내놓고 싶다. ”
김관명기자
kimkwmy@hk.co.kr
■최근 나온 글쓰기 교재들
글맛돋우는 글쓰기 여기에…
그렇다. 책이 없다고 타령하기보다 우리의 관심이 부족한 탓도 있다.
조금만 신경을 쓰면 괜찮은 글쓰기 교재를 구해 볼 수 있다. 통째로 암송해야 할 정도로 최상급의 교재인가, 하는 것은 다음 문제이다.
우리의 손길을 기다리는 글쓰기 교재는 어떤 것이 있을까?
우선 온고지신의 교훈으로 다시 한번 살펴 볼 이태준의 ‘문장강화’(창작과비평사)가 있다.
김동인의 ‘감자’, 정지용의 ‘바다’, 김진섭의 ‘창’ 등 저자가 가려뽑은 120여 개의 명문장이 가득하다. 문체의 하나인 ‘우유체’에 대한 저자의 설명. “‘탐화봉접(貪花蜂蝶)이란 말이 있거니와, 꽃을 탐내는 것이 어찌 봉접(벌과 나비)뿐일 것이냐’ 하면, 강건한 문체요, ‘탐화봉접이란 말이 생각나거니와, 꽃을 탐내는 것이 어찌 봉접에 한한 일이랴’ 하면, 우유한 태가 난다.”
소설가 한승원씨의 ‘글쓰기 교실’(문학사상사)을 추천하는 사람들도 많다.
1968년 등단한 중견 소설가이자 탁월한 문장가로 평가받는 저자는 좋은 글이란 읽는 이가 공감할 수 있는 글임을 전제한 뒤, 모두 21개 장으로 나눠 글쓰기 방법을 설명한다.
‘직유법과 은유법은 글맛을 돋운다’ ‘의문점을 속시원히 풀어주는 설명문’ ‘세상에서 가장 강한 글, 논설문’ 등.
문학과지성사에서 나온 ‘국어의 풍경들’이라는 책도 있다.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에서 언어학 박사과정을 수료한 고종석씨의 책인데 우리 글을 미시적으로 꼼꼼하게 관찰했다.
예를 들어 복수를 뜻하는 접미사 ‘들’의 경우, 구체적으로 수를 나타내는 말이 들어있으면 이 ‘들’을 붙이지 않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여러 사람이 다쳤다”가 “여러 사람들이 다쳤다”보다 더 자연스럽게 들리는 이유다.
이밖에 최근에는 이화여대 언어교육원에서 한국어작문 과목을 강의했던 양진오씨가 ‘산문의 수사학’(태학사), 리의도 한국초등국어교육학회장이 ‘우리 말글의 현실과 이상’을 냈다.
문화관광부도 각종 공문서에서 틀리게 쓰기 쉬운 우리 글 사례를 중심으로 ‘이런 말 실수 저런 글 실수’를 발간했다.
띄어쓰기와 맞춤법에 관해서는 800여 쪽의 방대한 분량이 돋보이는 ‘바른 띄어쓰기 맞춤법’(세창출판사)이 있다.
김관명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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