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날 박지은(21)은 선두를 끝까지 지킬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아마시절이지만 한번도 마지막날 역전당한 적은 없었으며 계절상 이제 우승할 때도 됐다”고 당당하게 응답했다.그 말대로 역전패는 없었다. 백전노장 줄리 잉스터(40)를 상대로 프로데뷔 5개월여만에 첫 승을 기적의 역전극으로 엮어냈다.
‘슈퍼루키’ 박지은이 올 시즌 미 여자프로골프(LPGA)투어 데뷔후 13번째 대회만에 첫 승을 따냈다. 박지은은 5일 오전(한국시간)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머렐스 인렛의 워치소 플랜테이션이스트GC(파 72)에서 열린 캐시 아일랜드 그린스닷컴LPGA클래식(총상금 75만달러) 마지막 4라운드서 갈비뼈 통증으로 물리치료를 받고 출전했음에도 잉스터에 5개홀을 남겨두고 3타차까지 뒤지는 절망적인 상황을 극복하며 2언더파 70타를 추가, 최종합계 14언더파 274타(66-68-70-70)로 한타차 뒤집기 승을 일궈냈다.
우승상금 11만2,500달러(약 1억2,000만원)의 목돈도 챙겼다. 박희정(20)은 이날 5언더파를 몰아쳐 합계 5언더파 283타로 공동 12위에 올랐으나 장정은 1오버파 289타로 공동 47위, 권오연은 8오버파 296타로 77위에 그쳤다.
◆ 상보
전반에는 잉스터의 원숙함이 돋보였다. 박지은은 1번홀(파4), 잉스터는 2번홀(파4)에서 각각 보기, 긴장감을 드러냈다.
1번홀 보기로 공동선두를 허용한 박지은은 2번홀서 3번우드로 친 세컨샷을 핀 11㎙ 지점에 떨어뜨려 절묘한 롱퍼팅으로 버디, 보기에 그친 잉스터에 다시 2타차로 달아났다.
하지만 파5의 3번홀서 잉스터의 서드샷이 홀로 직행, 행운의 이글이 되면서 두번째 공동선두를 이뤘다.
낙천적인 성격의 박지은이지만 초반의 기싸움에서 다소 눌린듯 5번홀(파4)에서 세컨샷이 그린 왼쪽으로 휘면서 3온-2퍼팅, 두번째 보기를 했다. 잉스터는 버디, 점수차가 순식간에 다시 두타차로 벌어졌다.
박지은의 그 좋던 페이스는 전반내내 살아나지 않았다. 이후 6∼9번홀을 파세이브에 그친 채 전반을 1오버파로 끝냈다.
잉스터는 2언더파로 마감, 계속 2타차 리드를 유지했다. 이때 잉스터에게 머물러있는 듯 했던 ‘승리의 여신’이 박지은에게도 한번 기회를 주기라도 하는 듯 10번홀로 이동하는 순간 갑자기 천둥번개가 내리쳐 경기가 중단됐다.
박지은에게는 숨을 고를 수 있는 순간이었고 잉스터로서는 리듬이 흐트러지는 시간이었다.
2시간15분뒤 재개된 10번홀(파5). 박지은은 서드샷을 컵 60㎝에 붙여 버디를 낚으면서 분위기를 반전시켰다. 잉스터도 12, 13번홀(이상 파3)의 줄버디로 맞섰다.
이때까지만 해도 3타차. 누가 봐도 다 끝난 듯했다. 하지만 게임은 이때부터 시작이었다.
박지은은 침착을 유지하면서 16번홀(파4)을 2온-1퍼팅으로 버디, 2타차로 좁혔다. 이어 승부의 하이라이트인 17번홀(파5). 앞조의 잉스터는 여기서 어프로치샷이 뒤땅을 쳐 보기를 했다.
반면 박지은은 그린 위쪽 러프에서 서드샷을 홀컵 1㎙에 붙인 뒤 버디, 극적인 동타를 이뤘다. 잉스터는 장시간의 플레이로 집중력이 무너진 듯 18번홀(파4)에서도 3㎙ 파퍼팅에 실패했다.
박지은은 세컨샷이 그린 위쪽 에지에 떨어졌지만 서드샷을 핀 2㎙에 붙인 후 침착하게 파세이브, 감격의 첫 승을 일궜다.
남재국기자
jknam@hk.co.kr
■[박지은] '초원의 아마조네스' 별명
‘그레이트 그레이스(Great Grace).’ 짜릿한 역전승으로 미 LPGA투어 첫 승의 감격을 맛본 박지은(21)의 별명은 ‘초원의 아마조네스’이다. 왠만한 남자골퍼 못지않은 드라이버샷의 비거리때문에 붙여진 별명.
이 대회 2라운드 3번홀(파5·452야드)에서도 드라이버 티샷을 무려 303야드나 날려 갤러리들의 탄성이 그칠 줄 몰랐다. 하지만 이 대회 우승직전까지 ‘슈퍼루키’의 명성에 걸맞지 않은 성적으로 국내팬들을 적지 않게 실망시켰다.
1월의 프로데뷔전(네이플스 메모리얼)서는 컷오프를 간신히 통과한 뒤 최하위에 머무는 등 프로의 높은 벽을 실감했다. 혹독한 적응기를 끝낸 박지은은 5월말 끝난 코닝클래식에서 13위에 랭크, 정상궤도 진입에 성공했음을 알렸다.
미국명 ‘그레이스’가 본격적인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때는 1998년 US여자아마추어대회 우승을 차지할 무렵이었다. 그해 아마대회 5관왕을 차지하면서 전문가들로부터 “드라이버스윙이 완벽에 가깝다”는 찬사가 쏟아졌다.
애리조나주립대에 재학중 참가한 대학투어서도 7승, 더 이상 아마에서는 적수를 찾기 힘들 정도였다. 주니어시절 거둔 33승 등 아마추어 통산전적은 55승.
지난해 US여자오픈을 끝으로 프로로 전향한 뒤 LPGA투어 2부리그 퓨처스투어에 참가했는데 이때 10개 대회에 출전해 무려 5개 대회를 휩쓸며 다승왕과 상금왕을 차지했다. 아마시절부터 이번 대회까지 합치면 통산전적이 61승에 달한다.
10세때 부모의 손에 이끌려 골프채를 잡은 뒤 미국으로 골프유학을 떠났다. 리라초등학교 졸업후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전 LPGA투어 선수였던 캐시 맨트의 지도를 받으며 기본기를 다졌다. 이때부터 비약적인 성장속도를 보이며 14세때 이미 최정상의 주니어골퍼 반열에 올랐다.
이후 피닉스의 여자골프 명문팀 자비에르에서 체계적인 훈련까지 받았다. 비록 중퇴했지만 애리조나주립대 시절 골프대회 참가로 분주한 가운데서도 학업성적은 뛰어났다. 하지만 골프와 학업의 병행을 위해 지난해 이화여대 사회체육학과 3학년에 편입했다.
정원수기자
nobleliar@hk.co.kr
■[박지은 인터뷰] "겨울에 나빠진 스윙감각 되찾아"
“뭐라고 얘기할 수 없을 만큼 기쁩니다. 그동안 성적이 좋지 않아 마음고생을 많이 했는데 그 정도는 누구나 겪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박지은은 우승소감을 묻자 감격이 채 가시지 않은 듯 목소리가 떨리기조차 했다.
박지은은 당초 내주쯤 휴식을 계획했었으나 이번 대회 우승으로 16일부터 열리는 에비앙마스터스 출전자격을 얻어 10주연속 출전한다.
_ 승부처는 어디였다고 생각하나.
“17번홀(파5)이었다. 세컨샷이 그린을 넘어 컵까지 25㎙ 정도를 남겨놓고 있었는데 러프가 길고 그린이 내리막이었는데다 볼은 바닥에 박혀 어려운 상황이었다. 똑바로만 치면 된다는 생각으로 샷을 했고 다행히 1㎙ 거리에 붙어 버디를 잡았다.”
_18번홀에서 1.2m 파퍼팅을 남겨놓았을 때 어땠나.
“처음에는 무척 떨렸다. 그러나 아마추어때 겪었던 같은 경험을 떠올리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_이 대회 직전까지 부진했는데.
“지난 겨울부터 갑자기 스윙이 나도 모르게 바뀌었다. 고쳐지다가도 대회에 나가면 다시 나쁜 습관이 나왔다. 욕심이 과했던 탓도 있다. 아버지가 가끔 오셔서 해준 조언을 따르다 보니 내 스윙을 찾을 수 있었다. 마이클 라보(골프다이제스트의 피칭에디터)가 쇼트게임을 집중보완해 준 것도 큰 도움이 됐다.”
남재국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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