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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세상 / 21세기라고…

입력
2000.06.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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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도 진정 사라진 걸까우리 안의 파시즘

임지현 외 지음, 삼인 발행

이 책이 나오기 직전 공교롭게도 장원씨의 성추행 사건이 있었다. 진보적 사회운동가로서 명망을 쌓던 그가, 신뢰관계를 이용해 여대생을 성추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또 낡은 정치판을 새로 짤 것으로 기대했던 386 의원들은 어떻했는가?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 전야에 룸살롱에서 여자를 끼고 공짜 술을 퍼마셨다.

TV 코미디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개그 콘서트’의 ‘불사파’라는 코너에서는 개그맨 심현섭이 ‘형님’으로, 김준호는 이 형님을 깍듯이 모시는 ‘아우’로 나온다.

개인의 인간성은 모조리 말살된, 깡패 세계의 상하 인간관계를 그대로 옮겨놓은 이 코너에 우리 20, 30대 방청객들은 환호성을 지른다.

우리는 이 현상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저자들은 이를 ‘우리 일상 속의 파시즘’으로 규정한다.

권위주의적이고, 대중동원적이고, 가부장적이고, 전체주의적인 그 모든 이름들을 파시즘이라고 할 때, 제도화한 ‘민주사회’에서 이 파시즘이 살아있다니?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물론, 프랑코, 페론, 박정희가 사라진 지금, 그것도 ‘국민의 정부’에서 파시즘이 살아있다니?

서론과 ‘일상적 파시즘의 코드 읽기’를 쓴 한양대 사학과 임지현 교수가 그 해답의 실마리를 던진다.

그가 예시한, 지난해 6월 고려대 노천극장에서 열린 콘서트 ‘자유’의 참가 경험은 매우 시사적이다.

래퍼 김진표. 그는 어른들이 싫다며 기성세대를 향해 직격탄을 날린다. 그가 “외쳐 봐’ 하면, 청중은 일제히 “닥쳐 봐”라고 응답한다.

하지만 자신의 밴드 멤버들을 소개하는 대목에서 그는 돌변한다. 어른들에게 “닥쳐 봐”하던 기세는 간 데 없고, ‘형님들’을 소개하고 대하는 그의 태도는 ‘조직의 쓴 맛’을 본 사람처럼 정중하기 짝이 없다는 것이다.

임교수는 “‘닥쳐 봐’는 상업적 전략이고, ‘형님들’이 그의 진짜”라고 단언한다.

일상적 파시즘의 예는 얼마든지 있다. 박정희를 복제하고 싶은 인물 1위로 꼽은 대학생들, 낙선 인사차 방문한 청와대에서 대통령에게 큰 절을 올리는 1980년대 운동권 출신 후보, 노동자·학생 연대를 외치면서도 타교생이나 외부인의 도서관 출입을 막는 서울대생들…. 그래서 마르크스는 “모든 죽은 세대들의 전통이 악몽과도 같이 살아있는 사람들의 머리를 짓누른다”라고, 랭보는 “삶을 통째로 바꾸자”라고 절규한 것은 아닐까?

책은 이렇게 우리의 일상을 교묘하게 조작해 사람들을 자발적으로 굴종하게 만든 ‘권력장치’에 주목한다.

대전대 정치학과 권혁범 교수는 일상적 파시즘을 가능케 한 그 권력장치의 하나로 반공주의를 꼽는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강제된 반공주의 교육으로 인해 모든 비판적 생각과 운동, 주류 이탈적 사고가 ‘좌경’ ‘용공’ ‘불순’의 혐의로 연결된다는 것이다.

저자는 우리 몸 안에 자리잡은 이러한 반공주의가 심지어 사회적 약자의 저항을 봉쇄하고 길들이는 역할까지 수행한다고 주장한다.

재러동포 2세로 경희대 러시아어과 전임강사를 지낸 박노자씨는 한국의 군사문화를 살핀다.

그는 한국의 많은 남성들이 사회적인 풍요를 남보다 더 누리기 위해 2-3년 비인간적인 대우를 참아낸다는 사실을 충격적으로 받아들인다.

내무반의 집단적인 음담패설이 제대후에도 여성에 대한 냉소적이고 소비적인 성향을 정착시킨다는 그의 주장을 전혀 근거없다고 할 이 땅의 남자들이 있을까?

충복과 강인한 애국자와 인간 로봇을 원하는 한국의 보수 정객들과 재벌들의 요구로 인해, 구타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관찰도 내놓는다.

부천 성고문 사건 이후 미국 클라크대 여성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권인숙씨의 글도 가슴에 와닿는다.

386세대에 대한 통렬한 자아비판이다. 그는 전대협·한총련 의장들이, ‘의장님’으로 떠받치면서 누렸을 권위와 자기 숭상의 경험이 기존 정치판에 어떤 새로움을 던질 수 있는지 회의한다.

진보적인 학생운동 모임에서도 남자 동료의 팬티와 양말을 빨아주고 음식을 만들어준 여학생이 가장 인기있었다는 일화를 소개하면서.

책에는 이밖에도 일상적 파시즘을, “너 뉘집 아들이야?”라는 말 속에 내재된 가부장적 혈통주의, 권위주의적이고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는 한국의 건축문화에서도 찾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은 결국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하여 몸과 마음을 바쳐 충성을 다할 것을 굳게 다짐’한 우리에게 보내는 메시지이자, 전통과 민족과 민중이라는 이름으로 뿌리 내린 일상적 파시즘의 종언을 갈구하는 목소리이다.

●이 책은 어떻게 만들어졌나?

이 책은 인문사회과학 계간지 ‘당대비평’ 8호(1999년 가을)와 9호(1999년 겨울)에서 다룬 ‘우리 안의 파시즘’이라는 주제의 글들을 위주로 모은 것이다.

여기에 ‘당대비평’ 10호에 실린 박노자씨의 글과, 월간 ‘건축인 포아’의 대표인 전진삼씨의 새 글을 묶었다.

저자는 임지현(한양대 사학과) 권혁범(대전대 정치학과) 김은실(이화여대 여성학과) 유명기(경북대 고고인류학과) 김근(서강대 중국문화학과)교수, 김기중 변호사, 박노자 전 경희대 러시아어과 전임강사, 김진호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상임대표, 문부식 당대비평 편집위원, 권인숙 전진삼씨 등 11명이다.

김관명기자

kimkwm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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