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문학의 시대가 이미 끝났다고 말했는가. 문학에 대해 가차없이 사망선고를 내린 돌팔이 의사는 또 누구인가. 문학은 결코 죽지않았다. 시퍼렇게 살아있을 뿐만 아니라 흑염소만큼이나 힘이 세어서 허약 체질의 수많은 영혼들에게 원기를 북돋아주는 구실을 아직도 착실히 수행하고 있다.누대에 걸친 가업을 이어받아 옹기만들기 한가지로 평생을 보낸 노인을 오래전에 취재한 적이 있었다. 시대풍조와 생활양식의 변화에 따라 양은그릇에 멱살을 잡히고 플라스틱류에 따귀를 얻어맞고 아파트 문화에 걷어채이는 등으로 해방 이후 줄곧 사양길만을 걸어야 했던 우리 옹기의 서글픈 운명을 증언하면서 노인은 땅이 꺼지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서도 살아 숨쉬는 그릇으로서의 전통 옹기가 지닌 우수한 보관성과 위생성, 내구성및 미관성 등등에 대한 자부심을 신앙처럼 피력하기를 잊지 않는 것이었다.
많은 장점과 미덕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쇠퇴일로를 걷는 것이 오늘날 어찌 옹기뿐이겠는가. 문학의 운명 또한 옹기의 그것과 별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상매체한테 손찌검당하고 물질 만능주의한테 발길질당하면서 문학은 점점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사양길의 문학을 붙들고 끝내 놓지 못하는 내 신세가 처량하게 느껴질 때마다 나는 사촌보다 낫다는 억지의 힘을 빌려 견강부회하면서 문학의 효용성과 영원성을 강변하곤 했다. 제아무리 난다 긴다 하는 영상매체일지라도 문자매체의 주춧돌을 딛지 않고는 제대로 설 수 없다, 볼 만한 텔레비젼 프로나 영화를 찾기 위해 신문의 해당 소개란을 뒤지는 사람들의 심리가 그 증거의 일단이다,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 눈이 번쩍 뜨일 만큼 희한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영상매체의 총아로서 그간 문학의 숨통을 죄는 일에 한몫 단단히 거든 바 있는 텔레비전이 이제까지의 고자세를 버린 채 문학의 도움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언제부턴가 텔레비전 화면의 아랫도리를 굵직긁직한 글씨들이 허옇게 점령하기 시작하더니만 지금은 뉴스와 드라마를 제외한 거의 모든 오락 또는 토크쇼 프로에서 자막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는 형편이다. 한 방송만 그런 게 아니라 모든 방송이 다 똑같다. 엄연히 눈에 보이는 그림과 귀에 들리는 소리가 있는데도 시청자들이 이미 파악한 것들을 다사 한번 문자로써 설명해 준다. 이해가 더딘 시청자를 위해서 어려운 내용에는 담당 프로듀서의 이름으로 친절한 해석까지 곁들인다. 영상매체로서의 정체성마저 희생시켜 가며 화면의 상당 부위를 문자로 뒤발해 놓는 이것이야말로 문학 행위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혹자는 전국민을 청각장애인 취급하는 듯한 발상이라며, 시청률 경쟁에 집착한 나머지 방송국들이 잠시라도 더 시청자들의 눈을 화면에 붙잡아두기 위한 술책삼아 벌이는 짓이라고 혹평하지만, 나는 그런 주장에 별로 동의하고 싶지 않다. 기회 있을 적마다 언필칭 공익성을 내세우는 우리 방송국들이 절대로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해외 바이어들이 한국의 방송 프로를 사고 싶어도 화면을 허옇게 덧칠한 그 자막을 처리할 방법이 없어 고개를 돌린다고 혹자는 지적하지만, 외국에다 팔아먹는 것이 뭐가 그리 대수인가. 우리끼리 보고 듣고 즐기면 그만이지, 외려 나는 해외 바이어들 눈치 안 보는 우리 방송인들의 빳빳한 주체의식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나는 요즘 우리 텔레비전의 자막 활용 추세를 두고 뒤늦게 문학의 위력을 십분 인정한 결과로 받아들여 텔레비전에 감사한다. 그리하여 나는 오늘도 문학하는 사람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수상기 앞에 앉아 방송인들이 애써 제작한 그림과 소리는 외면한 채 화면 아랫도리의 문학만을 즐긴다.
윤흥길 소설가·한서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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