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대 총선 여권후보 공천작업에 관여했던 문민정부 한 관계자가 들려준 얘기는 충격적이다. 누구라고 하면 금방 알 수 있는 운동권출신의, 지금은 야당소속인 재선의원의 정치데뷔 때 얘기다. 당시 여당이었던 이 젊은 후보의 주문사항은 기성정치인을 뺨칠 정도였다고 한다. 예컨대 지역구내 각종 민원사항을 ‘이 문제는 국세청, 저 문제는 검찰, 안기부에…’ 식으로 ‘찍어대는’ 요구가 이 관계자를 곤혹스럽게 했다는 것이다. 운동권은 순수하고 기성의 때가 묻지 않았으리라 믿었던 기대가 일순간 무너지더라고 했다.■그가 주문한 요점은 적중했고, 상대 유명 야당인사는 낙선의 고배를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여권 프리미엄을 이렇게 누리고서 당선이 안된다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그가 보기에는 운동권이니, 시민운동가니 하는 사람들도 한꺼풀 벗기고 보면 그렇고 그런 경우가 없지 않았다고 했다. 오히려 기성세대보다 더 교활한 사람도 적지 않다. 사회가 이들을 호의적 시각으로 보았다면 그건 착각일 뿐이라는 그의 체험담은 설득력이 있었다.
■여권의 386세대 당선자들이 5·18행사 전야에 벌인 술판과 시민운동가의 성추행 및 금품수수사건으로 몹시 시끄럽다. 기존 정치판의 대체세력이기를 바랐던 기대가 무너진 데 대한 실망감일 수 있고, 또 착시현상이 현실화한 데 대한 좌절감일 수도 있다. 간통한 사마리아 여인을 향해 “누가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느냐”고 했던 예수의 말처럼 이들만을 탓할 수도 없을 듯싶다.
■문제는 이들에 대해 근거없이 부풀려진 기대다. 운동권이면 모두 검증받은 듯이 여기는 풍조가 사라지지 않는 한 이런 시행착오는 불가피하다. ‘운동권=새피’라는 맹신이 사라지지 않는 한, 또 기성세대가 이들에 대한 맹목적 충원의사를 포기하지 않는 한 이런 착시현상은 앞으로도 계속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노진환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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