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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신화'일군 장인 무대뒤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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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신화'일군 장인 무대뒤로

입력
2000.06.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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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에는 그룹체제가 각 사간의 협조라는 장점이 있었지만 세계적 흐름과 여건을 볼 때 이제는 전문경영인체제로 경영하는 게 국제경쟁사회에서 성공하는 길이라고 생각해 오늘부터 본인은 모든 경영일선에서 물러납니다.”‘맨손으로 신화를 창조한 거인’ 정주영(鄭周永·85)현대그룹 명예회장이 31일 이 짤막한 친필메시지를 던지고 두 아들과 함께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 격동의 현대사에서 경제발전의 산 증인으로 우뚝 서며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는 말을 남긴 그의 퇴장은 63년만의 일.

정명예회장은 건설 중공업 자동차 전자 등 중화학공업을 주력사업으로 키워내고, 건설과 자동차 전자 등 분야에서 해외시장 개척에 앞장서왔으며, 구 소련과 중국 등을 방문하며 북방외교의 한축을 담당했던 민간외교관이기도 했다. 특히 그는 1998년 6월 통일소 500마리와 함께 판문점을 통해 방북하는 드라마를 펼친 이래 금강산관광을 성사시키는 등 남북 민간경협의 선구자적 역할을 자임해왔다.

■ 가난이 싫어 가출

1915년 11월25일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 아산리에서 가난한 농부의 장남으로 태어난 정명예회장은 대를 이어 농사짓기를 바라는 부모의 뜻과 달리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19세 때 4번째 가출에 성공, 막노동판을 전전하다 38년 서울 중구 신당동에서 쌀가게인 ‘경일상회’를 열었다.

40년 서울 서대문구 아현동에 자동차수리공장인 아도써비스를 창업했다가 46년 중구 초동에 현대자동차공업사로 확대했다. 47년에는 오늘날 현대건설의 모태인 현대토건을 설립했다.

전쟁 이후 전후 복구 건설사업에 주력한 그는 57년 최대 단일공사였던 한강인도교 복구공사를 맡아 일약 대형건설업체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62년 단양시멘트공장으로 시멘트제조업에 뛰어든 데 이어 65년에는 태국의 파타니 나리왓 고속도로공사를 따내면서 국내 최초로 해외에 진출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68년 경부고속도로 건설을 주도했다. 68년에는 현대자동차를 설립하고 포드의 코티나를 조립·생산하면서 자동차산업에도 진출했다.

세계가 그를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72년 현대중공업을 창업하면서. 당시 국내에는 대형선박 건조경험이 전혀 없던 상황이었는데 그는 현대중공업공장을 건설하는 동시에 26만톤급 대형 유조선 2척을 건조했다. 2년3개월만에 조선소 건설에서부터 배를 건조·진수한 일은 세계 선박 건조 역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83년엔 현대전자를 설립해 중공업-건설-자동차-전자를 주력으로 하는 중화학그룹의 기틀을 완성했다.

■ ‘하면 된다’는 경영철학

맨손으로 사업을 시작해 연매출 100조원 규모의 현대그룹을 일궈낸 그의 경영철학은 ‘하면 된다’는 불도저정신이다. 건설 자동차 중공업 전자 등 어떤 사업도 진출할 당시는 쟁쟁한 경쟁자들이 있었으나 특유의 뚝심과 배짱, 도전력으로 돌진해 결실을 거두곤 했다.

현대중공업을 창업할 때만 해도 거북선이 새겨진 500원짜리 지폐 한 장만 들고 유럽으로 달려가 대형선박 주문을 받아냈다. 경부고속도로 역시 설계와 공사를 동시에 펴는 속전속결식 공법을 동원해 공사기간을 대폭 단축시켰다. 그의 방을 찾는 임원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말은 “해보기나 했어?”였다.

일단 추진하면서 해결법을 찾는 그의 독특한 경영법은 압축성장을 이룬 한국경제사의 표상이었다.

박정규기자

jk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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