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팔봉비평문학상 정과리씨 수상소감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팔봉비평문학상 정과리씨 수상소감

입력
2000.06.01 00:00
0 0

"시적 정의의 무기로 '문학의 환란'이겨야"지난달 8일 팔봉비평문학상이 저에게 주어졌다는 한국일보사의 사고(社告)와 함께 심사보고서, 심사평 그리고 인터뷰 기사를 읽으면서, 저는 무척 겸연쩍었습니다.

줄곧 남의 글에 대해서만 얘기를 하던 사람이 갑자기 자신에 대한 글을 읽게 되었을 때, 그것도 논쟁적인 시비가 아니라 과분한 평가를 들었을 때, 물건을 사러 시장에 들어간 사람이 장바구니에 담겨 나오는 듯한 황망함이 스쳐지나가지 않을 리 없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저는 이 쑥스러움이 심한 부끄러움으로 변해 가는 것을 느꼈으며, 급기야는 북북 긁어대고 싶은 붉은 염증이 얼굴 전체를 뒤덮는 기분에 휩싸이고 말았습니다.

생각해 보니, 그 염증의 씨앗은 지난 10년 동안 제가 알게 모르게 제 안에 키워 온 어떤 오기 혹은 오만함이었습니다. 그 오만함에 까닭이 없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정치적 장벽의 붕괴와 사회 상황의 급격한 변모를 미리 대비하지 못한 90년대 한국 지식인의 표류와 문화산업의 회오리에 휘말린 문학의 환란에 대한 저 나름의 최선의 방어책이었습니다.

저는 저 표류와 환란에 대해 ‘시적 정의(詩的 正義)’라는 낡아빠진 무기 하나로 버티는 것만이, 그리하여 패배의 운명을 항구화시킴으로써 승리자들의 도취한 얼굴에 결코 사라지지 않을 불안의 그림자를 남기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라고 일찌감치 마음을 접어두고 있었습니다.

‘무덤 속의 마젤란’은 그렇게 아등바등 버티며 살아온 저의 생이 지나간 자취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행동 원칙도 그것이 절대적인 금언이 되면, 그래서 상황과의 탄력을 상실하게 되면, 그것은 추한 독사(Doxa), 꼴사나운 고집으로 전락한다는 것을 저는 시나브로 망각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시적 정의’는 본래 아주 너그러운 개념인 것인데도 저는 그것을 흡사 융통성이라고는 씨알머리도 없는 사법관처럼 혹은 ‘장미의 이름’의 요르게 신부처럼 문학의 문을 낙타의 바늘구멍만큼이나 좁혀가고 있었고, 그리하여, 문학 그 자신을 터무니없이 옹졸한 것으로 만들고 있었던 것입니다.

팔봉비평문학상 수상 소식을 들으면서 저는 문득 그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아마도 그것은 앞서 수상하신 선배 비평가들의 심해를 품은 바다와도 같은 청청한 비평 세계를 상기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한 어쩌면 이 상의 문양(紋樣)을 이루고 계신 팔봉 선생의 생의 궤적을 떠올리면서 제 마음 속 어느 곳에 맺혀 있던 물집이 터져 저의 혈관을 아리게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니, 투명하고 맑은 빛이 투과되어서 어지러운 명암의 조화를 펼치고 있는 이 어두컴컴한 궁형(弓形)의 그늘 속을 지나가는 순간은 제가 한국문학에 대해 더욱 너그럽고 저 자신에게 더욱 엄격해야만 한다는 약속을 스스로에게 거는 찰나라 할 것입니다.

문학이 주변으로 퇴각하고 있는 때, 그러면서도 문명의 신화를 장식하는 관모(冠毛)처럼 문학이 오용되고 있는 때, 문학의 권능을 과장하지 않고 문학의 힘을 묵묵히 키우기 위해 그 약속은 천금과 같다 할 수 있습니다. 제게 그만한 역량이 있는지 심히 두렵습니다. 그 두려움을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정과리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