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국단 8년만에 탈퇴 극단 찾아나서는 프리랜서94년 늦가을 주진모(43)는 낙엽 흩날리는 서울 장충동 국립 극장앞 잘 닦인 오르막길을 생각에 빠져 걷고 있었다. 배우로서 안정된 생활이 보장된 국립극단 생활 8년차였다. 희랍비극 등 국립극단만이 할 수 있는 중후한 작품들에서 그만의 연기력을 인정받고 제법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국립에서 25개 역을 소화한, 쓰임새 많은 배우였다. 특히 90년 국립극단의 ‘오이디푸스왕’에서는 당시 초빙돼 온 그리스 연출자가 오디션장에서 그를 주역으로 지목할 정도였다. 특유의 우렁찬 목소리는 희랍극에 적격이었다.
월급을 타는 별정직 공무원. 그보다, 단원 모두 수준 이상의 연기력을 보유한 훌륭한 팀웍, 흥행에 신경쓰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
국립이 주는 매력은 분명 컸다. 그러나 고즈넉하기만 한 그 길을 맨날 다녀야 한다는 생각에 부딪히자, 너무 심심해졌다. 보다 정확히는, 관(官)의 냄새가 싫었다. 그는 그해 12월 국립극단을 홀홀 나왔다.
“만일 사십 나이로 국립에 입단했더라면 그만 두지 않았을 테죠.” 그의 별난 삶은 그렇게 시작됐다. “성격이 단선적이라, 머리 쓰는 걸 싫어해요.”
나온 후 3년까지는 자유가 즐거웠다. 그러나 캐스팅 제의가 끊기면서, 슬슬 불안해졌다. 자유는 고독했다. 이후 그는 자신이 극단을 찾아 나섰다. “작품, 연출, 출연 배우, 보수 가운데 하나만 마음에 들면 작업에 참여하는, 무소속 프리랜서 배우가 된 거죠.”
6월 11일까지 극단 여백이 알과핵소극장에서 공연하는 ‘아싸나체’의 경우 역시 그렇다. 2월 극단측이 출연 가능 여부를 물었을 때, 그는 한달째 극단 즐거운사람들의 ‘인간 박정희’에서 열연중이었다.
권좌에 오르고 저격될 때까지, 가장 극적인 모습의 박정희를 연기했다. 어릴 적 한남동 달동네에서 살았던 덕에, 제3한강교 개통식 때 동네 어른들과 나란히 걸었던 박정희를 자신이 연기하게 될 줄이야.
그렇게 그는 사람들과의 부대낌 속에서 컸다. 76년 고려대에 입학한 그는 극예술연구회에 들어가, 경고 3번을 맞고 6년 만에 졸업했다. “최유진, 장두이 같은 ‘악마들’ 덕분이죠.”
‘아싸나체’에서 끊임없이 긁어대는 처를 둔 베르그만을 연기하다 보니, 그는 항상 묵묵히 자신을 믿어주는 아내 안봉희(45)가 요즘 새삼 고맙다. 9월 서울연극제 참가작 ‘오이디푸스-인간’에서 크레온왕 역으로 출연키로 돼 있다. 영화배우 주진모와 이름이 같아 가끔 오해받는다.
장병욱기자
aj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