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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한일교류좌담회 1/'한일 근대의 기로-병자수호조약 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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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회 한일교류좌담회 1/'한일 근대의 기로-병자수호조약 전후'

입력
2000.05.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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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균형상실 동북아 불행... 강화도는 21세기 新협력 상징"한국일보사와 일본 요미우리(讀賣)신문사가 공동주최한 제2회 한일 교류좌담회가 5월20일 인천 송도비치호텔에서 ‘한일 근대의 기로-병자수호조약 전후’라는 주제로 열렸다.

양국 참석자들은 좌담회를 통해 1876년 강화도에서 체결된 병자수호조약의 역사적 의미를 분석하고, 강화도의 지정학적 문화사적 위상을 점검하면서 바람직한 양국 우호관계 정립방안을 모색했다.

한일 양국을 오가며 열리는 좌담회는 한국과 일본이 공동개최하는 2002월드컵의 성공을 기원하고 21세기의 성숙한 한일관계 정립에 기여하기 위해 기획됐다.

첫 행사는 지난 해 11월 일본 쓰시마(對馬島)에서 ‘조선통신사’를 주제로 열린 바 있다. 제3회 좌담회는 11월 일본 나라(奈良)에서 열리며, 2001년 5월 경주, 11월 도쿄(東京)에 이어 마지막으로 2002년 5월 서울에서 대미를 장식한다.

"강화도는 근대화와 외국침략의 입구"

제2회 좌담회의 발언내용을 소개한다.

▲ 이어령=독일 철학자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에 따르면 사람은 고층빌딩에서 떨어질 때 일생의 파노라마가 몇 개의 장면으로 머릿 속을 스쳐간다고 합니다.

국가나 민족의 역사도 몇 가지 장소와 공간으로 요약되는 순간이 있습니다. 강화도가 바로 그런 곳입니다. 강화도는 역사의 시간이 공간으로 응축된 땅, 기억의 땅입니다.

한국 일본 중국등 동아시아의 긴 역사가 몇 가지 장소로 축약되고 우리는 그 기억의 땅에서 다시 만나게 됩니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입니다. 여러분은 역사의 긴 시간을 강화도라는 공간에서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강화도가 지닌 역사적 의미를 요약해 보겠습니다. 대륙의 중국, 섬나라 해양세력으로서의 일본, 그 사이에 있는 반도인 한국은 세계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안정된 솥발처럼 각각의 지역적 특성을 지닌채 동아시아의 역사를 몇 천년동안 영위해왔습니다.

그런데 대륙의 중국이 바다로 나아갈 때, 또 바다인 일본이 대륙으로 나아갈 때, 다시 말해 반도가 위협을 받았을 때 가장 예민하게 이른바 ‘공진(共振)작용’을 일으킨 곳이 바로 강화도입니다.

중국대륙을 제압했던 몽골이 일본에까지 침입하려 했을 때 강화도는 34년동안 고려의 임시수도로서 투쟁했습니다. 대륙지향적인 국가가 해양의 아시아를 위협했을 때 일어난 강화도의 역사입니다.

거꾸로 근대 이후에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같은 사람이 한반도를 ‘이익선(利益線)’으로 보고 대륙를 향해 반도를 가로질렀을 때 강화도에는 또 한번 병자(丙子)수호조약(1876년·강화도조약으로도 부름)등 큰 지진이 일어납니다.

대륙, 바다, 그리고 반도라는 균형잡힌 세 문화가 공존할 때 아시아는 늘 편안했습니다. 그러나 세력균형을 잃고 대륙과 해양이 직접 맞닿게 될 때, 그리고 강화도가 반도성(半島性)을 상실하고 더이상 대륙과 바다의 문명을 중화시키는 ‘밸런서’(balancer:균형자)로서 역할을 하지 못할 때, 중국과 일본이 모두 불행해졌습니다.

몽골의 내습에서부터 정묘(丁卯)·병자호란(丙子胡亂), 병인(丙寅)·신미양요(辛未洋擾), 병자수호조약에 이르는 과거는 물론, 현재까지도 강화도는 분단국가가 대치하고 있는 가장 긴장된 군사지역입니다. 이북땅은 대륙에 흡수됐고, 한국은 해양문화에 흡수돼 또다시 반도성을 상실한 것입니다.

따라서 밸런서로서의 역할 회복과 강화도의 새로운 역할이 논의돼야 합니다. 역사를 되돌아보면서 역사가 새로이 만들어지는 강화도의 의미를 찾아봅시다. 과거문제에 국한할 것이 아니라 패러다임 쉬프트(Paradigm Shift)가 되는 새로운 문명을 찾아보자는 테마로 이야기를 나눠볼 것을 제안합니다.

▲ 우메하라=우리는 지난 해 11월 쓰시마(對馬島)에서의 첫 좌담회에서 조선통신사를 통해 150년 전의 에도(江戶)시대에 일본과 한국이 우호적인 관계였으며 일본은 한국에서 새로운 문화를 배웠다는 점을 토론했습니다. 이번 좌담회의 주제로 강화도사건을 다루고 싶다는 말씀을 이어령선생이 하셨습니다.

이 사건은 상당히 무거운 주제이지만 피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일 양국의 친선을 돈독히 하기 위해서는 역사의 가장 어두운 구석에까지 찾아 들어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마음으로 이 곳까지 왔습니다. 다시 이런 사건이 일어나지 않도록 반성을 더한 충분한 논의를 하지 않으면 한일 평화우호관계는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선생은 아주 깊은 철학적 고찰을 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대륙과 해양, 그리고 이 둘을 매개하는 반도라고 하는 모습으로 한·중·일의 관계를 파악하셨습니다. 저 역시 동아시아세계는 벼농사 수도(水稻)재배등 같은 생산형태를 갖고 있으면서도 각각 개성적인 문화를 발전시켜왔다고 봅니다.

서아시아에서 유럽에 걸쳐 있는 수렵과 목축을 기초로 한 문화와 상당한 차이가 있습니다. 그런 동아시아문화가 어떤 모습을 갖고 있는지 이야기를 나누고 새 길을 모색해야 합니다.

반도가 독자적인 모습을 잃어버리면 3국이 모두 불행해진다는 것은 대단히 흥미로운 시각입니다. 강화도를 시찰하면서 대단히 감동할 만한 유적, 그리고 부끄러운 유적 등 두 가지를 보았습니다.

이 섬에서 30여년이나 몽골에 대항했던 고려의 힘찬 모습, 작은 섬에 큰 궁궐과 요새를 만들고 그토록 견뎠던 것은 세계역사에도 드문 일입니다. 이노우에 야스시(井上靖)선생이 이를 소설 ‘風濤(풍도)’로 써서 일본인들은 고려의 저항정신에 깊은 감명을 받고 경의를 갖고 있습니다.

강화도는 간만의 차이가 큰 자연의 이점을 살렸고, 일본은 태풍의 덕택으로 이른바 ‘원구’(元寇)를 물리쳤습니다. 간만차와 태풍이라는 두 가지 ‘바다의 은혜’가 대륙의 군대를 물리친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일본이 강화도조약을 강요했지만, 근대화라는 것이 아무래도 비(非)유럽제국의 피할 수 없는 운명이 아니었는가 하는 점입니다. 서양문명을 어떤 형태로든 받아들이지 않는한 서양제국의 식민지가 된다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강화도는 근대문명이 최초로 들어오는 최초의 입구가 됐습니다. 그런데 한국의 근대화는 한일합방(1910년)등 일본의 침략으로 연결됐습니다. 강화도는 근대화와 외국 침략등 두 가지 의미의 입구였던 것입니다.

같은 동아시아제국인데도 일본이 침략을 했다는 점은 반성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필연이었는지, 다른 선택의 길은 없었는지, 한국의 경우 왜 근대화가 외국의 침략과 직결됐는지를 논의했으면 합니다.

일본처럼 나라 전체가 근대화를 이루어 침략 없이 자주적으로 근대화를 진행시킬 수 없었던 원인은 어디에 있는지를 기탄없이 토의함으로써 진정한 한일 평화우호친선의 길을 찾아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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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수호조약 체결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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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한일관계사 연표

좌담회 참석자명단

▲ 가미가이토=이선생님이 큰 패러다임을 말씀하셨지만, 저는 더 좁게 이야기하겠습니다.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 일본의 정치상황입니다. 세계 제국을 크게 나누면 아테네형과 스파르타형이 있다고 봅니다.

아테네는 상업이 번창한 해군국이고, 스파르타는 농업 위주의 육군국이었습니다. 전자의 대표적 사례는 미국, 후자는 러시아와 중국입니다. 일본은 형태적으로 보면 해군적이고 현재는 그렇습니다. 그러나 한국은 북쪽과의 군사적인 긴장이 큰 육군국입니다. 지금은 그렇지 않지만 얼마 전까지 한국정치를 움직인 사람들도 육군 군벌형의 인물이었습니다.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 일본의 특명전권대사는 구로다 키요타카(黑田淸隆)로 사쓰마(薩摩) 출신의 군인적 인물이었습니다. 부사(副使)는 훗날 조선공사가 되어 여러 역할을 한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였습니다.

실은 메이지(明治)일본은 해군형 국가가 됐어야 했습니다. 그러나 강화도조약 당시의 모습은 국가를 해군형으로 만드느냐, 육군형으로 가느냐를 놓고 망설이는 상태였습니다. 아시다시피 일본육군은 프로시아에서 배워왔으며, 육군을 활약시키려면 반도를 거쳐 만주, 대륙으로 가야 했습니다.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조슈(長州) 출신으로 육군의 원로이자 조슈정벌(政閥)의 정상에 있었습니다. 한반도를 이익선으로 해서 다음은 만주로 진출해야 한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정한론은 메이지6년에 나왔습니다. 그러나 1년반동안 미국과 유럽을 견학하고 돌아온 정부수뇌부의 사람들이 “지금은 내정을 튼튼히 할 때”라며 정한론을 물리쳤습니다. 이 때문에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는 하야하고 반(反)정한론자들이 정권을 잡았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1875년 강화도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강화도사건이 일어났을 때 일본수뇌부는 육군국으로 가느냐, 해군국으로 가느냐를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이 시기는 한국 뿐 아니라 일본에도 운명의 기로였던 것입니다. 강화도전투는 있었지만 제 조사에 따르면 일본수뇌부는 큰 전쟁을 벌일 생각이 없었습니다.

당시 최대 신문이며 사실상 정부기관지였던 동경일일신문(東京日日新聞)의 사설 논설에는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영국은 현재 제1의 문명국가이다. 영국은 중세에 대륙에 진출하려고 100년간 싸워 국력만 소진하고 실패하지만 그 뒤 바다로의 길을 택하고 대륙을 포기했다. 일본도 그런 길을 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설대로 됐으면 불행은 없었겠지요. 그러나 육군은 병력이 커서 정치적인 힘이 됩니다. 해군이 권력을 갖는다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한국도 그렇겠지만 일본도 숫자의 힘으로 정치를 눌러갔습니다. 이것은 큰 실패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길을 택하기는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일본이 영국형 아테네형 근대국가로 갈 수 있는 길은 있었지만, 그렇지 못했던 것입니다. 일본은 다행히 지금 무역중심의 해양국가이고, 그것은 지세(地勢)학적으로도 적합합니다. 크게 보면 메이지일본의 육군국가화는 잘못이고 실패입니다. 반성을 해야 하고 거듭돼서는 안될 일입니다.

▲ 이어령=이야기의 연결을 위해서 간단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일본의 가쓰 가이슈(勝海舟)로부터 이시바시 단산(石橋湛山)까지 “대륙으로 진출하지 말고 내치를 잘해야 번영한다”는 주장이 있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한일합병 때도 마이니치(每日)신문처럼 “일본에는 대륙컴플렉스, 늘 섬에서 대륙으로 가고 싶어 하는 꿈이 있었다. 그 꿈이 지금에서야 이뤄졌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1536-1598)도 못한 일을 해냈다고 생각하면 큰 착각이다”라고 통렬히 비판한 글도, 많지는 않지만 있습니다.

강화도조약의 의미는 해군이 많으냐 육군이 많으냐가 아니라 그동안 일방적으로 대륙의 문화가 일본으로 흘러갔던 과거의 역사가 근대화와 함께 거꾸로 바다의 세력이 대륙으로 진출해가는 큰 흐름의 변화가 있었던 것입니다.

과거의 식민지화과정을 보면 육·해군을 불문하고 대포와 군함을 끌고 와서 협박하고 겉으로는 외교를 하면서 침략을 합니다. 일본도 구로부네(黑船)에 의해 똑같은 일을 당했습니다.

사쿠마 쇼잔(佐久間象山)같은 사람은 왜 중국같은 대국이 유럽에 지는가를 생각하면서 유교를 버리고 대포연구만 합니다. 말을 탈 때 쓰는 등자가 봉건국가를 만들었다면 국민국가를 만든 것이 ‘대포패러다임’입니다. 배와 대포는 운요(雲揚)호사건의 상징입니다.

엄청난 힘으로 유럽을 압도했던 터키가 1593년 이스탄불에 영국배가 들어왔을 때 손을 들었습니다. 그 때 터키사람들은 영국인보다 배에 더 관심을 가졌습니다. 이미 강화도에는 일본이 오기 전에 독일 함부르크의 상인인 오페르트같은 사람이 총격전을 저지릅니다.

개항을 통해 장사를 하고 그 뒤에 대포가 있는 방식을 일본이 그대로 한국에서 실습한 것이 강화도조약입니다. 이것이 부국강병 패러다임이자 거함거포주의가 시작되는 계기가 됩니다. 이 부국강병패러다임을 우리가 정리하지 않고서는 21세기 한일관계와 세계에 대한 문제가 풀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병자수호조약은 한국인에게 무엇이고 강화도사건이 없었으면 독자적 근대화가 불가능했는지 이태진교수가 말씀해 주시지요.

▲ 이태진=2002년 월드컵의 한일 공동개최를 계기로 양국관계가 개선되기를 바란다는 말씀을 먼저 드립니다. 우리는 미래지향적인 노력을 해야 함과 동시에 과거역사를 청산해야 하는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양자를 병행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임무입니다. 50년동안 과거를 양국이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미래를 논하면서 동시에 그동안 미뤄둬야 했던 짐도 풀어야 합니다.

운요호사건은 양국이 근대국가로서의 교류를 처음 시작하게 했다는 점에서 중요합니다. 그런데 이 사건이 무력충돌이었기 때문에 후세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집니다. 지금까지의 기본적인 인식은 한 쪽은 승자요, 한 쪽은 패자라는 구성입니다.

다시 말해 일본은 조선의 문을 열어주려는 적극적인 자세인 반면 조선은 열지 않으려는 소극적인 자세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일본외무성 사료를 면밀히 연구해보니 운요호사건은 일본측이 적극적이었지만 강화도조약 체결과정에서는 조선도 적극적으로 문호개방의 계기로 삼으려는 자세가 돋보였습니다.

승자와 패자라는 역사인식은 한국병합 이후 일본의 지식인 학자와 언론인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었습니다. 일본이 한국을 근대화시켜주는 시혜자였다는 것을 강조하고 한국병합을 정당화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21세기 양국의 우호관계 확립은 이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과거의 한일 교류사에 대한 인식이 왜곡 위에 만들어진 거짓된 역사라는 것을 알고 탈피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정한론 얘기가 나왔지만, 1850~60년대 일본의 사무라이층은 조선을 정복하는 것만이 일본이 살 길이라는 인식을 대부분 갖고 있었습니다.

정한론은 1873년 일본정부 내에서 사이고 다카모리가 제기한 것을 지칭할 때가 많지만, 그것은 축소된 것이고 사무라이층 대부분이 정한론을 갖고 있었습니다. 요컨대 러시아가 내려오는 길을 막는 것은 일본이 맹주가 돼 동아시아가 뭉치는 길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와세다(早稻田)대 교수를 역임한 게미야마 센타로(煙山專太郞)씨는 1907년 ‘정한론의 실상’이라는 저서에서 사이고 다카모리의 주장은 소(小)정한론이요, 그 배경이 된 사족(士族) 전체의 생각은 대(大)정한론이라고 구분하는 분석을 한 바 있습니다.

‘소정한론 사건’ 이후 일본은 조선정복의 시기를 미루면서 정한론이라는 용어를 대외적으로 쓰지 않고 은폐하는 전략을 취했습니다. 1910년의 조선병합은 1850년 이래 정한론의 완전한 실현이었습니다. 그 때까지의 실상은 일본의 자기보호를 위한 침략이라는 점을 직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일본의 자세를 더 거시적으로 봐야 합니다.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만 해도 서양의 ‘만국공법(萬國公法)’, 즉 국제법적인 인식을 근거로 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1860년대부터 만국공법이라는 번역서를 알고 있었고 젊은 국왕 고종도 서양에 대한 지식을 많이 알고 있었고 개항에 대해 능동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에 대한 인식은 한·중·일이 각각 달랐습니다. 역사적으로 중국은 북방종족과 부딪치는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것을 방어하면서 중국은 서쪽으로부터 오는 문화를 전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반면 한국은 북방과 중국의 충돌의 여파 속에 있었고, 방어의 부분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중국의 문화를 일본에 전하는 역할도 했지요. 따라서 중간적인 입장이었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중립적이고 평화적인 노선이 외교의 기본이었습니다.

일본은 외부로부터 군사적으로는 안전지대였습니다. 또 문화적으로는 수혜자였습니다. 그러면서 필요한 것이 있으면 중국과 조선에 요구를 하고,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왜구의 경우처럼 침략과 약탈을 했습니다.

너무 일본역사에 대해 비판적일지 모르지만 일본은 에도시대 이전 중앙집권적인 국가의 역사가 없었다는 게 그런 현상을 막을 수 없는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에도시대 이후에야 대외관계에서 조선통신사가 교환되는등 평화주의노선이 나왔습니다.

그런 전통주의적 노선이 서양의 국제질서를 만났을 때 어떻게 반응했는가-동양3국이 각각 달랐습니다. 초대국 중국은 그런 서양의 국제법적 질서가 싫었습니다. 중국 중심의 질서를 붕괴시키는 것으로 알았습니다.

조선은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에서 벗어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국제법에 대해 무모할 정도로 기대가 컸다는 비판이 있을 정도였습니다. 일본의 경우는 국제법을 침략의 수단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조선은 국제법을 평화의 수단으로 인식했지만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사이고 다카모리의 스승이었던 기도 다카요시(木戶孝允)는 국제법을 ‘약자를 빼앗는 하나의 도구’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병자수호조약 제1조에 ‘조선은 독립국이다’라는 구절을 삽입한 것도 중국과의 관계를 끊게 하고, 조선침략의 야망을 실현하는 수단이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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