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다음달 4, 5일 모스크바에서 첫 정상회담을 갖는다. 이번 회담의 최대 이슈는 미국이 국가미사일방어(NMD)체제를 ‘합법적으로’ 구축하기 위해 러시아에 요구해온 탄도탄요격미사일(ABM) 협정(1972년 체결)의 개정 문제이다.지난 7일 대통령에 공식 취임, 미러 정상외교 무대에 데뷔하는 푸틴은 물론이고 임기를 1년 남긴 클린턴에게 이 문제는 양보할 수 없는 외교쟁점이다.
일단 다급한 쪽은 미국인 것 같다. 클린턴은 푸틴으로부터 극적인 양보를 얻어냄으로써 이미 실험이 끝난 미사일 방어망을 최소한 임기 중에 알래스카 등에 배치하길 원하고 있다. 그렇게만 되면 클린턴은 ‘마지막 치적’을 자랑하며 명예퇴진할 수 있고, 결국 NMD를 자신들의 전유물인 것처럼 선전해온 공화당을 11월 대선에서 제압하는데 결정적인 도움이 될 것으로 백악관은 믿고 있다.
때문에 클린턴 행정부는 그동안 푸틴의 대 체첸 전쟁에 대해 눈에 띄게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는 등 ‘러시아 달래기’에 골몰해왔다. 파이낸셜 타임스에 따르면 클린턴은 이번 회담에서 미국내 과잉공급 상태인 농축우라늄을 러시아로부터 수입하는 등 각종 ‘선물 보따리’를 풀 계획이다.
그러나 새뮤얼 버거 미 대통령 안보담당 보좌관이 28일 “ABM 개정에 대한 합의는 힘들 것”이라고 자포자기한 듯한 발언을 한 것 처럼 클린턴이 단번에 뜻을 이루긴 힘들 전망이다. 러시아는 미국측이 기존의 ABM 협정을 위반해 일방적으로 NMD를 구축할 경우 새로운 군비경쟁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특히 미국이 NMD 구축의 근거로 내세운 북한 이란 등 이른바 ‘깡패국가(Rogue States)’의 미사일 위협도 “목적을 정당화하기 위한 일방적 논리”라고 주장하고 있다. 더구나 푸틴은 27일 지난해 미 상원이 비준을 거부한 포괄적 핵실험 금지조약(CTBT)에 서명, ‘도덕적 우위’를 선점했다.
미국이 ABM 개정 문제를 지나치게 서두르자 유럽도 러시아쪽과 동조하는 모습이다. 안토니오 구테레스 포르투갈 총리, 하비에르 솔라나 외교·군사대표 및 로마노 프로디 집행위원장 등 유럽연합(EU) 대표들은 29일 모스크바에서 푸틴과 정상회담을 갖고 ‘미국의 대항세력’으로서 양자 관계를 강화할 것을 다짐했다. EU는 이번 회담에서 걸림돌이었던 체첸 문제를 의제에서 제외했다.
유럽의 행보는 기본적으로 미국이 자신의 안보에만 과도하게 집착하는데 대한 우려, 혹은 견제심리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솔라나 대표는 “미국이 러시아와의 합의없이 NMD를 구축할 경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동맹국 내에서도 ‘아주 나쁜’ 결과로 나타날 것”이라고 공격했다. 유럽의 이같은 반응은 ABM 개정을 갈구하는 클린턴과 전략적으로 화해하면서도 유럽과 미국의 갈등을 이용하려는 푸틴의 ‘이중 전략’과 맞아 떨어지고 있다.
한편 미국은 최근 노르웨이에 ABM 시스템 구축을 완료, 일방적으로 ABM 협정을 어기는 등 러시아를 우회할 태세도 숨기지 않고 있다. 미 국무부 관리들은 이미 여러차례 NMD가 안보상의 필요성 등 국익에 부합하다고 판단될 경우 러시아의 동의 없이도 추진할 것이라고 밝혀 왔다.
이동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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