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게 무슨 조화일까. 마치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영험한 존재가 있어, 이 사회에 가득찬 거짓과 위선을 징벌하러 나선 듯한 환상마저 든다. 그것도 이미 거죽까지 썩어 추한 알맹이가 드러난 구악들은 제쳐두고, 정의와 진실의 얼굴인양 세상의 밝은 조명을 받던 새 인물들의 위선만을 발가벗기고 있다. 가혹할 정도의 충격적인 방법으로, 온통 껍데기가 판치는 ‘가짜세상’을 꾸짖고 미리 경계라도 하려는 듯이.5·18 전야에 방자한 술판을 벌인 386 정치인들과 교육부장관·정신문화연구원장 등의 행각이 보도된데 이어, 이번에는 시민운동 지도자급 한 인사의 위선적 허울이 벗겨졌다. 미성년 여대생을 호텔방에 미리 불러두었다가 성추행을 했다니, 듣기가 참담할 지경이다. 서울의 여대생이 부산 호텔방까지 찾아간 경위 등이 얼핏 여러 의문을 떠올리게 한다. 그러나 중년 대학교수가 미성년 여대생을 추행한 것은 시민운동 리더의 도덕성을 논할 여지조차 없는 파렴치 범죄다. 사회 정의를 앞세운 위선자에게 사회 전체가 우롱당한 형국이다.
개인의 일탈행위를 시민운동 전체의 도덕성과 연결짓는 것을 우려하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추문을 개인적 차원이나 단편적 사건으로 국한시켜 볼 수 없다. 그의 행위가 안팎의 냉철한 검증없이 사회적 평가가 부풀려진 시민운동, 그 일부 주역들의 그릇된 자기인식에서 비롯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릇된 사회를 바로잡는데 시민운동이 이바지한 것을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사회의 부정적 속성은 시민운동에서도 끊임없이 노출됐다. 권력이나 기업과의 유착, 주도권 다툼, 소비자를 기만하는 이권획득 등 사회의 축소판을 보는듯한 비리들이 불거져 신뢰를 훼손했다. 특히 시민운동의 내실있는 추진보다 당장 사회적 호응이 큰 정치운동에 힘을 쏟고, 그 주역들이 진정한 성취를 고민하기앞서 대중의 스타로 떠오른데 도취한 모습을 보였다.
알맹이보다 거죽을 먼저 보는 사회, 내실아닌 허울에 스스로 취하는 시민운동이 일탈을 낳는 근원이다. 장 원교수가 환경운동을 하면서 알게된 여대생을 추행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풀이할 수 있다. 사회 외각의 외로운 운동가를 벗어나 화려한 조명을 받는 명망가로 부각됐다는 그릇된 자기인식이 스스로를 나락에 빠뜨린 것으로 본다. 이는 386 정치인이나 개별 시민운동가는 물론, 모든 형태의 시민운동과 단체 앞에 도사리고 있는 함정일 것이다.
결론은 분명하다. 위선이 판치는 사회지만, ‘껍데기’는 언젠가 퇴출된다.
그리고 시민운동의 위상이 급속히 높아진만큼, 위선의 허울도 빨리 드러난다. 철저한 자기반성과 검증만이 시민운동의 역량을 지키고 키우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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