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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다시본다](7) 중국의 한국전 참전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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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다시본다](7) 중국의 한국전 참전결정

입력
2000.05.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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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 중국의 한국전 개입을 결정했던 마오쩌둥(毛澤東)에게 전쟁은 정치목적 달성의 한 수단에 불과했다. 때문에 당시 그들이 방대한 인적 희생과 물질적 소모를 무릅쓰고 한국전과 같은 대규모 대외전쟁에 개입했을 때는 그 나름의 대내외적 정치목적을 갖고 있었을 것이다.당시 중국은 그들에 대한 소련의 중요성을 충분히 인식한 나머지 양립이 불가능했던 대미·대소관계에서 철저한 대소(對蘇) 일변도를 유일한 정책으로 선택했고 미국과의 극한적 적대관계에 까지 들어가는 것도 불사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특히 대소일변도 원칙은 단순한 대외정책상의 원칙일 뿐 아니라 공산화를 달성한 중국사회 전체 구성원의 행동과 사상을 하나로 통일시키는 보다 넓은 의미의 통치원칙이기도 했다. 그러므로 중국의 한국전 참전은 완전히 모스크바의 강압에 의한 단순한 피동적 결정이었다기 보다는 자신의 이익과 정치목적의 달성을 위한 자원적(自願的)·주동적(主動的) 결정요인이 중·소간의 특수관계에서 오는 피동적요인과 서로 결합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유엔군이 한국전에 개입한 이후 그들의 정치·군사목표가 수정·확대되어간 것도 중국의 참전 결정에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한 것 같다. 당시 미국은 한·만 국경 부근에 완충지대를 설정, 유엔군의 진입을 막고 중국의 정당한 이해를 보호할 경우 중국의 한국전 개입 가능성을 줄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 중국은 이러한 미국의 판단과는 달리 북위 38도선 이북을 그들의 안전을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 할 완충지대로 간주하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중국은 유엔군의 38도선 추월을 그들의 한국전 개입의 중요한 이유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1949년 정권수립이후 중국의 급선무는 권력을 당에 집중시키는 일이었다. 초기 정치적 통합과정에서 중국은 가능한 한 격렬한 방식을 피하고 보다 온건한 설득과 회유의 방식을 택했다. 그러나 1950년 하반기에 가서 중국정부는 중남부지역에서 토지개혁 등 개혁 추진에 대한 저항에 부딛치게 되었고 또 주로 경제와 생활상의 곤궁으로 인해 공산당의 통치에 대한 환멸과 불만이 전대륙으로 만연되고 있었다. 이같은 저항과 불만을 제거하고 억압하기 위해서는 보다 강경하고 격렬한 정책조치가 필요했다.

저항과 불만을 억제하는 대내정책과 대외적으로 긴장을 조성하는 정책과의 연계문제는 당시 중국의 정치적 통합과정에 있어서 하나의 이상적인 방법론으로 제기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중국의 한국전 개입은 중국내의 긴장조성이나 통제강화에 중요한 명분과 환경을 형성해 주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점은 한국전 개입이후 중국의 정책노선이 온건으로부터 강경으로 급선회한 데서 잘 드러나고 있다.

공산정권 수립이후 중국 내에는 국민정부군의 포로와 투항자, 구사회의 세력 및 조직, 국민당원 등 중공과 사상·이념적으로 서로 이질적인 계층의 존재로 대단히 복잡한 모순상황을 띠고 있었다. 따라서 당시 중국정부가 이러한 사회적 모순을 철저히 해결, 정치적 통합과 정권의 공고화를 이룩해가기 위해서는 광범위하고 융통성이 있으면서도 격렬한 방법을 찾지 않을 수 없었으며 여기서 채택되었던 것이 바로 대중운동이었다.

이러한 대중운동 방식은 당이나 행정조직 뿐 아니라 각종 매체와 법으로는 동원이 어려운 문화 예술 및 사회 제단체들의 다양한 사회역량의 동원이 가능하기 때문에 통치자가 의도하는 목표를 추진해 가는데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대중운동의 전개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군중동원과 군중역량의 조직문제이며 이를 위해서는 고도의 긴장상태가 불가결한 요소다. 즉 고도의 긴장상황에서 가장 효과적인 군중동원과 군중역량의 조직화가 가능해지고 특히 반혁명분자의 숙청이나 토지개혁등 보다 강렬한 저항이 수반되는 운동일수록 긴장상태는 더욱 필요해지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한국전쟁은 당시 중공정권이 사회내부의 심각한 모순을 제거하고 정치적 통합을 이루어 가는데 절실했던 긴장조성과 동원체제의 확립에 이상적인 계기와 환경을 제공해주었다. 특히 당시 중국지도자들은 그들의 정권 공고화를 위해 한국전을 십분 활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한국전 참전 결정에 대한 중국의 의도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중국의 한국전 개입 결정은 소련에 대해 ‘자기보전’적 혁명전략을 운용한 결과로도 볼 수 있다. 즉 당시 중국이 대규모의 군대를 한국전에 투입한 것은 국력의 단순한 소모였다기 보다는 소련의 정치·경제적 원조를 확보하고 만주에 있어서 소련세력을 보다 철저히 전면적으로 철수시켜 강력한 정치·경제 및 군사력을 확립하고 또 이를 기초로 궁극적으로 소련과의 종속관계를 청산, 독립자주노선을 추구하려는데 기본 목적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소련에 대한 혁명전략의 운용을 위해서는 마오쩌둥과 신생 중공정권에 대해 갖고 있었던 스탈린의 심각한 불신을 해소하는 일이 무엇보다 절실했다. 이같은 측면에서 당시 중국의 한국전 참전 결정도 중국이 소련의 철저한 영도를 받겠다는 정책의지를 행동으로 표현하고 구체화하는 방법으로 나왔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스탈린의 신임 획득에 대한 당시 중공정권의 절실성과 의지도 중국의 한국전 개입 결정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중국의 참전결정은 당시 당면하고 있었던 여건에서 그들의 능동적 정책이나 의지와는 다른 차원에서 이루어졌을 피동적 결정 측면과, 이러한 외적 압력에 의해 피동적 결정을 촉진시키고 또 그 결정 자체를 능동화시키는 측면으로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중국의 한국전 개입 결정은 바로 외래적 강박과 내재적 자원(自願)이 상호 결합된 산물이었다고 보여진다.

◆한국전쟁 발발계획과 중국

한국전쟁에 있어서 중국의 역할과 관련, 주목되는 것은 우선 전쟁의 계획과 추진에 중국이 어떠한 역할을 했느냐 하는 문제다. 이와 관련, 지금까지 중국이 계획추진 과정에 처음부터 적극 참여했다는 주장과, 거의 참여하지 않고 소극적인 자세를 취했다는 주장으로 대립돼왔다. 그러나 최근 부분적이나마 중국측 자료들이 개방되면서 한국전 발발계획에 중국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주장들이 점차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한국전쟁 발발 직전까지 베이징(北京)에서는 중국공산당 ‘7期3中全會’와 제1기 전국정치협상회의 제2차 회의 등 2개의 중요한 회의가 열렸고 이 회의결과 전쟁복구와 경제회복 문제가 정책의 우선 목표로 확정되었다. 회의 직후 발발한 한국전쟁은 그 진전 방향에 따라서는 이제 막 확정되었던 신생 중공정권의 기본정책 방향을 근본적으로 동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을 충분히 안고 있었다. 한국전쟁의 발발은 시기적으로 중국의 국가이익이나 정책방향에 결코 부합되는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중국은 당시 북한측과 긴밀한 연계를 갖지 못했으며 이로 인해 한국전 발발이나 진전상황에 대해 잘 알지 못하고 있었다.

한국전쟁의 발발과 6월27일자 트루먼의 대만해협 봉쇄선언 등 긴박한 사태가 발생하자 중국해방군 총참모부는 중앙정부에 한국전 상황 파악을 위해 군사시찰단의 파견을 건의하는 보고서를 제출했다. 중국정부는 군사시찰단 대표의 건의를 받아들여 군사시찰단 대신 대사 명의의 대표단을 파견하게 된다. 이를 계기로 1949년 10월6일 북한과 외교관계를 맺고도 개설하지 못하고 있던 대사관 설치를 본격 추진, 주평양대사관은 6월 30일 설치가 결정돼 열흘만인 7월10일 개설됐다.

이와 더불어 중국의 한국출병이 이미 결정되었던 10월8일까지도 김일성은 중국의 참전에 대한 명확한 확신을 갖지 못했다는 사실이 최근 중국측 자료를 통해 알려지고 있다. 결국 한국전쟁과 관련, 초기에 중·북한간에 충분한 대화나 협상이 없었으며 이는 한국전 계획에 있어서 중국이 적극 개입하지 않았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 한국전쟁이 중국에 미친 영향

중국은 한국전쟁에 개입함으로써 수십만명의 인명 손실과 중국역사 이래 최대규모의 탄약 소모를 비롯한 엄청난 물질적 소모를 겪었다. 그러나 이같은 손실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한국전 개입으로 소련으로부터 경제회복과 군 현대화에 필요했던 대규모 경제·군사적 원조를 확보할 수 있었고 한반도와 인도차이나 문제 해결을 위해 열린 제네바 국제회의에 참가, 신생정권의 국제적 위상을 높일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이 한국전에 개입함으로써 가장 중대한 영향을 받았던 부문은 당시 신생 중공정권이 추진했던 정치적 통합과 사회주의 개혁 등 국내정치였다고 볼 수 있다. 1950년 하반기 중국에서는 토지개혁을 비롯한 사회주의 개혁에 대한 심각한 저항과 경제생활의 궁핍으로 공산당 통치에 대한 환멸과 불만이 전국적으로 만연했다.

바로 이런 시기에 이뤄진 중국의 한국전 참여는 중국 내에서 긴장 조성이나 통제 강화에 대단히 유리한 명분과 환경을 제공했다. 특히 중국정부는 한국전 개입으로 조성된 긴장상태를 극대화함으로써 사상·이념적 갈등과 모순을 철저히 해결, 정치적 통합과 공산정권의 공고화를 성공적으로 이룩해갈 수 있었다.

또 중국인들로 하여금 배타적이던 소련을 철저하고 전면적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문제가 중국정부의 최대 현안이었는데 바로 한국전쟁이라는 외환이 이러한 현안 해결에 좋은 계기와 환경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중국이 한국전 개입으로 얻은 최대의 성과는 무엇보다도 중국의 생명선인 동북지역의 안전을 위해 절대 필요한 완충지대로서의 북한이 적대적 세력의 지배권에 들어가는 것을 방지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북한을 완충지대로 확보한 것은 지금도 중국의 한반도정책 결정과정에 있어서 중요한 고려요소로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다음은 6월5일(월)자에 ‘휴전협상과 미송환 국군포로 문제’

/박두복(외교안보연구원 교수)dbpark79@mofat.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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