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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위기 '설의 국면'

입력
2000.05.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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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야릇한 일이다. 경제위기면 위기고 아니면 아닌 것이지, ‘위기설’은 또 뭔가. 더욱이 이런 ‘설(說)의 국면’이 몇주째 계속되고 있다니 참으로 모를 일이다.‘호황기- 불황기-조정기’. 과거에는 거시경제 상황을 요약하는데 이 세가지 단어로 족했다. 그런데 요즘 상황은 이중 어떤 것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이도 저도 아닌 위기설이다.

생산 투자 등 거시지표들이 가파르게 치솟고 있는데도 어떤 전문가도 지금의 경제를 호황이라고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불황 또는 조정기냐고 물으면 더더욱 고개를 젓는다. 이런 지경이라면 그야말로 ‘위기설’ 그 자체를 경제사이클의 한 테마로 집어넣어야 할 판이다.

위기설의 단초를 제공한 근인(近因)들은 여러가지가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지난달 현대그룹 ‘왕자의 난’에서부터 현대투신 파동, 벤처열기 쇠퇴로 인한 증시폭락, 새한그룹의 워크아웃 진입…. 여기에 금융권 구조조정에 반발하는 이해집단들의 악성루머 생산도 시장 분위기를 흉흉하게 하는데 ‘일조’한 것 같다.

내부적 소요에 때맞춰 해외의 전문(電文)들까지 가세했다. 한국의 개혁성과에 대한 국제신용평가기관들의 평가절하 조치들이 불난 집에 부채질을 했다. 요컨대 여러 악재들이 안팎으로 맞물리면서 위기설이 걷잡을 수 없이 번졌던 것이다.

그런데, 정작 이같은 위기설의 진정한 ‘실체’에 관해서는 누구도 모른다는 사실이 아이러니컬하다. 금융권의 감춰진 부실이 거대할 것이라는 추정, 일부 재벌기업의 자금회전이 끊겨 제2의 대우파동이 일어난다는 소문, 그래서 외국투자자들이 한국시장에서 손을 뺄 것이라는 우려, 이런 시한폭탄들이 한꺼번에 폭발할 D-데이가 다가오고 있다는 막연한 짐작 뿐이다. 이건 마치 맹인의 코끼리 다리 더듬기식이며, 불이 어디서 났는지도 모르면서 불이야 하고 외쳐대는 꼴이다.

그래서 학자들도 언론매체들도 ‘불확실성’이니 ‘신뢰의 위기’니 하는 애매모호한 말로 위기설의 실체를 추상화하고 있다. 이는 사실 “뭐가 뭔지 잘 모르겠다”는 말을 둘러대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위기설의 본질은 바로 ‘무지와 불투명’인 셈이다. 그리고 이러한 위기설이 자아내는 것은 ‘혼돈’이다. 기업, 가계, 정부 등 경제주체들이 갈피를 못잡고 전전긍긍 좌불안석하는 카오스의 상태인 것이다. 혼돈이야말로 선진 경제의 암적 존재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문제는 최근과 같은 ‘설의 국면’이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을 것 같다는 데 있다. 작금의 상황은 요행히 해소된다 해도 앞으로도 ‘설의 국면’이 반복적으로 윤회(輪回)할 공산이 큰 것이다. 최근 일련의 사태가 보여주듯이 잠재된 부실덩어리들이 완전히 곪아 터지려면 아직도 상당 기간 걸릴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앞으로도 계속 개혁과 구조조정작업을 추진해 나가는 과정에서 불가피한 ‘피해’들이 발생할 때마다 위기설이 덩달아 터져나올 것이다. 그럴 때마다 시장이 마비되고, 시장과 정부가 헛된 공방을 벌이는 소모전을 치루다가 진짜 위기를 초래하게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면 아찔하다.

따라서 시장-정부간 시각의 괴리를 좁히는 것이 관건이다. 반드시 신뢰할 수만도 없는 외국기관의 평가에 흔들릴 것이 아니라 우리의 독자적인 자기검증 시스템이 필요하다. 대내외 변수와 데이터들을 조합해 국가경제의 안전도를 객관적 지표로 시시각각 투명하게 시장에 알리는‘자동 체온계’ 말이다. 알려는 의지만 있으면 우리 사정은 우리가 가장 잘 아는 법이다.

송태권 논설위원

songt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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