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5월 젊은 페미니스트 친구들이 ‘안티미스코리아 페스티발’을 하겠다고 했을 때 나는 어느 주간지에 이런 글을 썼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문제 있는가? 그런 것 같지 않다. 성별 구분이 중요하고, 젊고 늙음이, 그리고 결혼 여부가 중요한 사람들이 모여서 이쁘다고 생각하는 여자들을 한 줄로 세워 감상하면서 상을 주는 것, 별 문제는 없는 것 같다. 다원주의사회에서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일이 아닌가? … 문제가 되는 것은 그런 행사가‘아직도’ 거국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올 5월 미스코리아 선발대회 기사를 실은 신문을 읽으면서 나는 “아차!”했다. 한국일보사가 미스코리아 주최사인 것은 잊었군. 이제 한국일보 칼럼을 그만 써야 할까부다. “167 50 34-24-36, 173 52 34-24-34…키 몸무게 가슴-허리-엉덩이둘레…” 아무래도 너무 심하군, 전화를 걸까? 망설이던 차에 제2차 안티미스코리아 페스티발이 열렸고 나는 그 곳에 가서 신나게 놀다 왔다.
안티미스코리아 페스티발에 가면 자기만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창조해 낼 줄 아는 많은 여자들을 만날 수 있다. 팔순 할머니로부터 임산부, 150㎝ 통통한 대학생, 말할 때마다 모든 얼굴근육이 그림을 그리는 장애인, 13살 소녀에 이르기까지 획일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문화에 틈새를 내면서 살아가고 있는 여자들을 만난다.
축제를 마감하며 사회자인 변영주감독이 말했다. “안티미스코리아 페스티발은 내년에도 있을 겁니다.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있는 한 계속될 것입니다.” 에엥? 미스코리아 선발대회가 없어지면 안티미스코리아 페스티발이 없어진다고? 미처 생각지 못했던 부분이군.
해방 후 가난한 시절에 열린 초대 미스코리아 선발대회는 대단한 볼거리였을 것이다. 경제가 나아지고 패션산업이 성하면서 슈퍼 모델 선발대회가 열리게 되었고, 이를 통해 ‘미의 여왕’자리는 흔들리기 시작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미스코리아는 초기 국민국가가 만들어낸 미인이고, 슈퍼 모델은 근대 자본이 만들어낸 미인이며, 안티미스코리아는 후기 근대 시민사회가 만들어내는 미인이다. 한국의 근대화가 미인대회의 변천사 속에서도 고스란히 재현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미스코리아 후보들의 사진을 다시 한번 유심히 본다. 똑같은 한복과 똑같은 수영복을 입은 ‘미녀들’이 그리 미워 보이지 않는다. 미스코리아대회는 우리가 여전히 획일적인 사회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슈퍼모델이 되기에는 키가 작고 살이 좀 있어도 미인사절단으로 뽑힐 수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 아닌가. 몸매에 매겨지는 등급, 안면근육이 마비될 것 같아 불안감을 안겨주곤 하는 미소, ‘보통 남자’들이 ‘이쁜 여자’를 바라보는 ‘눈길’을 보면서 소녀들이 일찌감치 세상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하니 유용하지 않은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서 갑자기 지난 일년 사이, 무엇이 나를 이렇게 포용력 있는 인간으로 변화시켰는지가 궁금해진다. 모든 정든 것들이 일순간에 사라지는 초고속시대가 나로 하여금 모든 남아 있는 것을 사랑하게 만든 것일까? 다품종 소량생산시대에는 대량생산체제의 품종도 하나의 주요한 브랜드 아이템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제대로 인식하게 된 걸까?
미스코리아대회건 슈퍼모델 선발대회건 안티미스코리아 페스티발이건 오래도록 끊이지 말고 열려라. 그래서 우리가 사는 삶의 갖가지 모습을 숨김 없이 드러내 주라.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억압을 체계적으로 감추어 모든 저항을 유혹으로 잠재울 고도관리사회이다.
얼굴없는 상업자본에 의한 거대한 획일화의 물결에 가위 눌린 한 해를 보내면서 나는 이렇게 너그러워졌다. 후기 근대의 ‘안티’는 상대를 없애기 위해서 하는 운동이 아니다. 빛깔을 가진 사람, 남의 빛깔을 포용할 수 있는 아름다운 사람이 그립다.
/조한혜정·연세대 교수 사회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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