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민련 총재 이한동씨가 김대중대통령에 의해 국무총리로 지명되면서 국민들은 나라 일에 대해 여러가지 ‘걱정’을 하는 눈치다. 소수파 집권당을 이끌고 있는 대통령으로서는 공동정부의 명분을 되살리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하겠지만, 실제로 국정운용의 앞날을 생각할 때 과연 이런 식의 편법으로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정치가 가능하겠는지 눈앞이 캄캄한 것이 사실이다.이한동 총리 임명을 보도한 일본의 요미우리신문은 24일자 기사의 본문에서 ‘정합성(整合性)’의 문제가 있다는 걱정을 제기했다. 정합성이라면, 앞뒤가 잘 짜이고 아구가 맞는 모습을 가리키는 철학용어로, 이론내부의 무모순성(無矛盾性)과 같은 뜻이다. 공동정권의 해체를 발표하고 직접 야당선언을 했던 장본인이 말을 바꿔 바로 그 정권에 참여하는 것은 앞뒤도 아구도 안맞는 모순임을 지적한 것이다. “그것이 정치가 아니냐”는 시치미떼기는 한낱 궤변일 뿐이다.
국민들이 실망하고 진실로 ‘걱정’하는 일은 4·13총선의 결과가 가져다준 모처럼의 ‘상생의 정치’ 구도가 싹부터 잘려나가게 됐다는 점이다. 대화와 타협에 의한 정치라거나 초당적인 협력 같은, 반드시 이뤄내야 했던 정치실험의 기회가 박탈되었다는 점에서 걱정 이상의 안타까움이 있다. 남북관계의 진전 여부에 따라 더욱 절실한 국민대통합을 위해서도 상생의 정치가 실종되었다는 것은 큰 불행이다.
이한동 총리서리는 지난 선거에서 집권 민주당을 공격하는 데 선봉에 섰던 처지다. 투표 이틀 전 “이런 비열한 정권은 응징돼야 한다”는, 지금 돌이켜볼 때 하지 않았어야 할 극언까지도 서슴지 않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돌이키고 싶지 않은 말 하나는 “민주당은 이념이 불분명한 정당”이라고 내뱉은 ‘색깔공세’일 것이다.
그는 정치에 입문한 5공 시절 이후 문민정권 시절에 이르기까지,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 역정과는 전혀 딴판인 대척(對蹠)의 길에 서 있었다. 스스로 보수세력의 대표주자를 자임(自任)해 왔고, 그런 자임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그의 경력, 성향, 언동으로 미뤄 지금 대통령이 건곤일척 내달리고 있는 대북정책은 아마도 그와는 가장 큰 이견이 엄존하는 분야이기 쉽다. 어떻게, 어떤 생각으로 그가 남북정상회담이라는 거대한 역사적 이벤트에 국정관리자로서 동참할 것인지, 국민으로서는 그것도 ‘걱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걱정’들을 모두 뛰어넘는 걱정스러운 생각 하나가 끈끈하게 남는다. 그가 대통령으로부터 총리서리임명장을 받은 자리에서 했다는 ‘서약’이다.
“그동안 대통령께서 경제위기를 안정시키고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된 것에 경하드린다. 신명을 바쳐 나라와 대통령에게 충성하겠다.”
그는 바로 기자들과 갖게 된 간담회에서도 ‘臨己秋霜 盡忠報國(임기추상 진충보국)’이라는 한자성어로 소감을 말했다 한다. 자기 자신의 몸가짐은 추상같이 하고, 충성을 다하여 나라에 보답한다는 뜻이겠다. 여기서도 다시 ‘충성’을 다짐하고 있음을 본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함은 인간윤리의 기본이다. 그 뜻이 나쁘다거나 시대에 맞지 않는다거나 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충성의 맹세가 어느 인격을 상대로 하는 것이라면, 그때는 문제가 다르다. 충성서약을 받는 사람은 제왕이거나, 적어도 제왕적인 보스의 분위기를 풍긴다. 근대적 민주주의 사회의 권력구조안에서 일어날 수 있는 풍경과는 거리가 있다. ‘진충보국’이라는 고전적 국가관과 더불어 요즘도 일본의 길거리에서 자주 구경꺼리가 되는 극우시위대의 어깨띠가 연상되었다면, 그것은 그렇게 생각하는 자의 개인적인 편견이요 ‘걱정’일는지 모른다.
때마침 “일본은 천황중심의 신의 나라”라는 넋나간 소리로 국민지지율이 2%대로 곤두박질했다는 모리 요시로(森喜朗) 일본 총리의 첫 방한이 29일로 임박했다. 고교·대학시절 럭비선수였다는 그는 떡벌어진 어깨를 가진 강성우파 성향의 정치인이다. 지난 92년 자민당 정조회장이던 때 그는 모교인 와세다대학의 학생들앞에서 근 모교인 와세다대학의 학생들앞에서 “일본에 와있는 한국인 노동자들은 군사행동도 일으킬 위험이 있다”는 식의 망언을 한 일이었다. 그는 잇단 실언에 대해 최근 한 일본인 평론가는 “이런 사나이를 총리로 앉힌 일본인의 빈도에 문제가 있다“고 격렬히 성토한다.
이한동 총리서리는 말론 모리 총리와는 크게 다르다. 국민이 생활의 피로감을 씻는데 도움주는 정치인으로 거듭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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