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와 정치-'문화국가'에 대하여문화의 주체로서의 국가는 20세기 이전까지는 비교적 낯선 현상이었다.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대제에서부터 조선조의 세종이나 영조·정조에 이르기까지 문예진흥과 관련해 이름이 거론되는 군주들은 드물지 않지만, 문화에 대한 그들의 개입은 전근대적 사회 구조와 기술적 여건 때문에 매우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국가가 문화의 주체로서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20세기초에 사회주의 정권들이 들어선 뒤부터다. 진보의 열정으로 무장한 이 새로운 정권 담당자들은 문화에서 선전·선동의 힘, 새로운 인간형을 창출할 수 있는 거푸집의 역할을 발견했다.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함께 문화는 역사상 거의 처음으로 적극적인 ‘정책’의 대상이 되었다.
●문화와 정치-'문화국가'
1959년에 비(非)공산권 사회에서는 처음으로 프랑스에 문화부가 생겼고, 이 관행은 이내 유럽대륙과 세계의 여러 곳으로 퍼져나갔다. 한국에서도 1973년부터 10월 20일을 ‘문화의 날’로 제정해 기념해 오고 있고, 1990년에는 문화부(현재의 문화관광부)가 창설됐다.
문화계 인사 들의 다수가 문화부의 창설을 지지했음은 물론이다. 삶의 다른 부문과 마찬가지로 문화도 정책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은 이제 범상히 받아들여지고 있다.
현대의 국가는 점차 ‘문화국가’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문화국가’라는 말은 대체로 긍정적 맥락에서 사용되고 있다. ‘문화 국가’라는 말이 지닌 여러 겹의 의미 가운데 하나는 ‘문화 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국가일 것이다. 그 국가는 ‘문화’의 생산과 유통을 지도하려고 할 것이고, 그런 지도를 선결적 임무로 생각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문화’라는 말로 지칭하는 문학이나 여타 예술들에 유익한 일일까? 결코 그렇지 않다는 것이 프랑스의 문학사학자 마르크 퓌마롤리의 대답이다. 그의 ‘문화국가’(1992)는 비록 프랑스를 분석의 대상으로 삼고 있지만, 프랑스의 문화적 상황을 곧잘 한 범례로 생각하고 있는 우리도 읽어 볼 가치가 있다.
퓌마롤리는 프랑스를 ‘문화국가’로 만든 가장 큰 책임을 드골 정권의 문화부 장관이었던 앙드레 말로와 미테랑 정권의 문화부 장관이었던 자크 랑에게 돌린다. 앙드레 말로가 초대 문화부 장관으로 취임하기 전까지는, 프랑스 국가는 정치적·사회적 사업을 지도하는 데 만족하고 예술 창작자들과 예술 애호가들을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말로 이후로, 특히 자크 랑 이후로, 국가는 진정한 ‘문화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모든 수단을 틀어쥐고 그것을 자기 선전이나 대중의 여가 조직의 도구로 사용해 왔다. 그 결과로 문화는 일종의 국교(國敎)가 되었다. ‘문화국가’의 부제가 ‘한 근대적 종교에 대한 에세이’인 것은 시사적이다.
퓌마롤리는 19세기 말, 20세기 전반기의 서로 적대적인 이데올로기적 흐름들이 기묘하게 결합해서 문화국가의 기원이 되는 양상을 살핀다.
저자에 따르면 문화국가의 기원이 되는 이데올로기들은 1870년대 독일의 비스마르크가 가톨릭 교회에 맞서 수행한 문화투쟁, 20세기 들어 좌파 지식인들을 매료한 마르크스주의 예술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비시 정부 하에서 민족의 문화적 중흥을 외쳤던 ‘청년 프랑스’ 운동, 문화를 프랑스 민족의 ‘세포조직’으로 만들어버린 말로의 메시아적 꿈 같은 것들이다. 이 모든 것들이 일종의 ‘문화당(文化黨)’ 안에서 화해하고 혼합돼, 권력을 틀어쥐었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1959년에, 앙드레 말로는 모든 프랑스인들에게 문화를 배급하고 전세계에 프랑스 문화를 선양하는 것을 임무로 삼는 국무위원이 되었다. 그러나 이 경건한 바람의 면사포 안에는 불길한 현실이 숨겨져 있었다.
프랑스의 예술과 문학은 무엇이 ‘문화적’이고 무엇이 ‘비(非)문화적’인지를 결정할 권한을 부여받은 한 줌의 문화 관료들에게 차압되었다. 이 경향은 자크 랑이 문화부를 맡았던 시절에 더 심화했다.
퓌마롤리에 따르면, 이 시절의 프랑스는 파리의 문화적 성직자(곧 자크 랑)가 자신의 초현대적인 광기(狂氣)로 전체주의 국가에나 어울릴 법한 전시(展示) 문화 행정을 전국토에서 수행하는 것을 목격했다. 퓌마롤리는 여기서 랑 시절의 프랑스에서 끊임없이 조직된 떠들썩한 문화 축제들을 지적하고 있다.
그와 나란히 ‘문화권력’은 모든 것을 ‘문화화’하는 선동적 담론을 만들어냈다. 그래서 ‘청년문화’니 ‘기업문화’니 하는 말들이 예술 문화와 동일한 차원에서 거론되었다. 그러나 이런 ‘문화 담론’들은 기실 문화적 황무지의 등장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고 퓌마롤리는 말한다.
왜냐하면 위대한 쇼진행자로 변한 국가가 자기 마음에 드는 모든 활동들을 과대평가하면서 진정한 창조와 아마추어적 취미생활의 차이를 지워버린 것이 이 ‘문화담론’들의 실상이었기 때문이다. 문화에 관료주의가 스미는 순간 창조력은 고갈된다는 것이 퓌마롤리의 생각이다.
‘문화권력’은 무대에 신경을 쓴다. 그래서 프랑스라는 ‘스펙터클 공화국’에서 유명해지고 싶은 사람들은 텔레비전을 서임(敍任) 장소로 삼는다. 당연히, 텔레비전은 신성함의 아우라를 부여받았다. 이 상설쇼의 가장 큰 패배자는 책과 대학이다.
책들은 이 ‘문화의 슈퍼마켓’에 진열된 수많은 문화상품들 가운데 가장 눈에 안 띄는 곳에 처박혀 있다. 예전엔 진정한 앎에 접근하는 통로였던 대학은 이제 ‘문화 관광’ 공간들로 대치되고 있다. 이 공간 안에서 국가는 ‘모두를 위한 문화’의 신도들로 변한 시민들을 즐겁게 해주며, 할인판매와 자기 자랑에 열중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문화 국가’의 가장 걱정스러운 대목이라고 퓌마롤리는 말한다. 즉 문화국가는 ‘집단적 여가활동의 정치 경제학’에만 몰두하는 것이다. 이렇게 프랑스의 문화는 여가활동이나 취미생활로 변했고, 프랑스의 문화공간은 일종의 라스베이거스로 변했다.
퓌마롤리의 의견으로는, 개인적 문화의 가치들로 돌아가는 것만이 프랑스를 다시 위대한 문화의 나라로 만들고 파리를 다시 유럽 정신의 수도로 만드는 길이다. 퓌마롤리의 ‘문화국가’는 예술에 대한 우파적·엘리트주의적 입장에 근거해서 오늘날의 문화 국가를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 담긴 프랑스 중심주의를 걷어내면, 그것은 또 하나의 ‘문화 국가’가 되어 가는 한국에서도 성찰의 틀이 될 법하다.
●러 혁명초기 문화조직 '프롤레트쿨트'
퓌마롤리가 옹호하는 ‘개인적 문화의 가치’는 딱히 국가와 문화 사이의 관계만이 아니라 강력한 이념적 지향을 지닌 집단 일반과 문화의 관계를 치유하는 약이 될 수 있다. 문화를 황폐화하는 집단적 ‘정열’은 꼭 국가의 형태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러시아 혁명 초기의 ‘프롤레트쿨트(Proletkult)’는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 문화’라는 뜻의 러시아어 약칭인 프롤레트쿨트는 1917년 여러 영역의 예술에서 문화 계몽을 자임하고 조직된 노동자 문화운동조직이다. 이 조직은 예술 장르별로 수십개에서 수백개의 서클 안에 100만에 가까운 회원을 보듬고 있었다. 회원의 44%는 노동자였다.
프롤레트쿨트의 기획은 야심적이었다. 이들이 보기에 혁명은 단지 정치·경제적 문제는 아니었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문화 혁명이 돼야 했다. 그 문화는 예술만이 아니라 인간 관계의 총체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프롤레트쿨트의 지도자들은 혁명 러시아의 문화가 오로지 ‘노동의 문화’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초창기의 이 조직을 이끈 보그다노프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세 축 위에서 진행된다. 첫째는 당에 속하는 정치적 축이고, 둘째는 노동조합에 속하는 경제적 축이며, 셋째는 프롤레트쿨트가 관장해야 할 문화적 축이다. 그가 보기에 문화는 사회적 총체로부터 자립적인 영역을 대표했으므로, 프롤레트쿨트의 활동은 당의 활동과 독립적이어야 했다.
보그다노프는 심지어 프롤레트쿨트의 인적 구성이 본질적으로 프롤레타리아적이므로 당보다도 정치적으로 선진적인 조직이라고 단언했다. 프롤레트쿨트의 후원 아래, 노동자들은 부르주아 지식인들의 도움 없이 이전 사회들의 문화적 유산을 흡수해서 새로운 프롤레타리아 문화를 창조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문화 전문 지식인들은 배제되었고, 대중 문화조직의 독립을 통해서 프롤레타리아만의 특수한 문화를 창조하겠다는 열망이 선양되었다.
적어도 1917년부터 21년 사이에 프롤레트쿨트는 소련에서의 모든 문화 활동을 거의 독점한 채 ‘인간 관계의 혁명’을 위한 대중운동을 지휘했다. 프롤레트쿨트의 영향권 바깥에 있던 예술가들은 일단의 미래주의자들 뿐이었다.
레닌을 비롯한 당 지도자들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극좌적 경향으로 치닫던 이 조직은 1932년에 당이 ‘예술 조직들의 개조에 관한 결의’를 채택한 뒤에야 해체됐다. 프롤레트쿨트는 ‘문화 국가’만이 아니라 ‘문화 조직’도 문화의 매장자가 될 수 있다는 한 예증이라고 할 만하다.
편집위원 고종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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