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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워치] 동아시아의 실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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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워치] 동아시아의 실험

입력
2000.05.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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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드워치] 동아시아의 실험동아시아에 싹트는 새로운 형태의 ‘지역주의(regionalism)’가 주목을 받고 있다. 이데올로기의 대결이 막을 내린 1990년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이나 아시아 태평양 경제협력체(APEC)등으로 다양하게 나타났던 지역주의의 모습과는 동기나 목표가 다르다. 그 때가 역내 자유무역과 통상협력을 위한 블록의 성격이 강했던 데 비해 이번에 주목받는 동아시아의 협력모델은 ‘통화블록’을 지향하고 있다.

얼마 전 태국 치앙마이에서 열린 아시아개발은행(ADB) 연례총회에서 한국 일본 중국과 동남아국가연합(ASEAN) 10개국은 경제위기 발생시 통화스와프(교환)를 통해 대처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들기로 합의했다. 유동성위기가 국제통화기금(IMF)의 개입을 초래했고, 이로부터 가혹한 시련을 겪었던 1997년의 경험을 공유하는 동아시아 국가들이 일종의 자구대책을 마련한 것이다.

여기에는 당시 위기가 세계화의 부정적 부산물이었다는 인식, 세계화의 방식이나 그 전위기구로부터는 보호를 얻지 못한다는 각성, 유일한 슈퍼파워 미국의 세계주도에 대한 의심, 그리고 역내협력으로 자기강화를 꾀하려는 새로운 모색 등의 공통된 정서가 깔려 있다. 아시아지역의 지역협력기구로 아세안과 APEC이 있었지만 위기 앞에 이들 기구는 완전히 무력했거나, 전혀 작동되지 못했다는 인식도 함께 하고 있다. 특히 APEC의 경우 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이익보호 장치라는 성격을 이미 내포하고 있기도 했다.

동아시아 통화스와프는 제대로 작동된다면 강력한 효과를 발휘할 수 있을 것이라는 평가들이다. 3월현재 이 지역의 총 외환보유액은 8,000억 달러를 웃도는 것으로 집계된다. 전문가들은 이 돈의 10~20%만 동원되어도 지난번 아시아경제위기 정도는 너끈히 극복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유동성위기가 닥친 국가는 자국의 통화를 맡기는 대신 역내의 달러를 충분히 갖다 쓸 수 있으니 이제 IMF나, 특히 미국에 달려갈 일이 없어지는 것이다.

이 구상은 당초 일본에 의해 주도됐다. 일본은 1997년 당시 유사한 구상으로 아시아통화기금(AMF) 창설을 추진했으나 미국의 견제로 뜻을 이루지 못하다 이번에 이를 구체화시키게 됐다. 그러나 이 구상이 성사단계에 들어설 수 있었던 것은 중국의 참여가 결정적이었다. 중국은 홍콩 보유분을 포함해 2,500억 달러에 달하는 외환을 보유, 환위기로부터는 완전한 자유를 누리고 있는 셈이다.

동아시아지역은 기존의 아세안 10개국에 지역강국인 한중일 3개국이 가세, 통일된 행동기구를 만들어 내면서 세계화의 무대에서, 또는 서방기구들을 상대로 보다 강력한 목소리를 가질 수 있다. 물론 단기적으로는 고사하고 중장기적으로도 유럽연합(EU)같은 수준의 동질적 통합체로 발전할 가능성은 희박하다. 정치적 적대감이 아직 내재하는데다, 지역패권 다툼이 상존하고, 다양한 경제격차, 상이한 문화 역사적 배경 등이 EU와는 판이하다.

그렇다 해도 과거에 없던 하나의 틀이 동아시아에 새로 창출되는 것만은 분명하며, 이것이 어떤 형태로든 진화할 가능성은 열려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세계교역에서 일본과 중국 양국은 수출입 모두 5위 안에 들어가고 수출순위에서는 한국도 6위를 차지한다. 게다가 중국의 비중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한중일 3국과 아세안국가와의 교역규모가 98년 1,220억 달러나 되는 점을 들어 대미일변도의 교역질서를 자체적으로 탈피할 수 있는 이 지역의 잠재력을 중시하는 견해도 있다. 정치적 동맹이 아니라면 한중일의 이해는 얼마든지 일치의 폭을 넓힐 수 있다.

그러나 내부지향적 협력만으로 세계경제의 흐름에 주도적으로 동승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또한 그런 식의 일방적 기도를 미국 등이 방치할 리도 없다는게 그간의 경험칙이다. 주변주류와의 복합적 관계설정 속에서만이 동아시아 지역통합도 의미를 가지게 돼 있다. 동아시아의 새로운 지역주의는 ‘열린 지역주의’라야 하고, 이런 관점에서 서방 분석가들은 비상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다.

조재용 국제부장

jaecho@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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