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사람을 사람답게] (19) 무시당하는 보행권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19) 무시당하는 보행권

입력
2000.05.22 00:00
0 0

재래시장과 대형 약국이 밀집한 서울 종로5가 사거리. 갓 상경한 듯한 노인이 길을 건너기 위해 주변을 두리번거려 보지만 도무지 방법이 없다. 서성이길 10여분. 결국 무단횡단을 결심하고 왕복 10차선의 차도에 발걸음을 내딛는 순간 오토바이와 화물차, 버스들이 일제히 경적을 울려댄다.이곳을 지나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겪었음직한 일이다. 이런 상황을 두고 서울시정개발연구원 정 석(鄭 石·38) 도시설계연구팀장은 “대한민국 국민은 목숨 걸고 길을 걷는다”고 지적한다. 안전하고 쾌적하게 걸을 수 있는 보행권(步行權)은 서구 선진국에서는 기본권으로 자리잡은 지 오래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발전우선주의에 사로잡힌 무분별한 도시계획과 자동차 우선 교통정책에 밀려 ‘걸을 수 있는 권리’는 아직 요원하다”(이선영·李善榮 녹색교통운동 간사)는 지적처럼 여전히 ‘부수적’ 권리일 뿐이다.

보행권이 무시당한 결과 나타나는 폐해를 살펴보자. 우리나라 교통사고 사망자는 매년 1만명 안팎에 달한다. 이중 보행중 사망자 비율이 절반이나 된다. 서울시의 경우 지난해 교통사고 사망자 566명중 322명(57%)이 보행중 사망했다(도로교통안전관리공단 99년도 조사). 인구 10만명당 보행자 사망수도 한국 25개 주요도시 평균이 7.17명으로 네덜란드(0.76명)보다 9배나 높다. 충남 공주시는 무려 16.76명이나 된다(99년 녹색교통운동 조사).

교통사고가 아니라도 인도에 들어선 노점상, 상점의 진열대, 무질서한 적재물과 간판 등은 보행자의 짜증을 가중시킨다. 작년 10월 서울YMCA가 발표한 ‘종로 보행환경 조사결과’에 따르면 종로 일대는 노점상과 불법적치물로 보도폭이 원래의 6∼8㎙에서 1∼2㎙까지 좁아진 것으로 나타났다. 더구나 5㎙마다 하나꼴로 자리한 노점들이 인근 건물에서 전기와 가스를 무단으로 끌어쓰고 있어 대형사고의 위험마저 도사리고 있다.

시정개발연구원 정 석 팀장은 “철저한 자동차 ‘주행권’ 위주의 정책이 개선되지 않는 한 인간적인 도시를 가꾸는 일은 먼나라 이야기”라고 진단했다.

이주훈기자june@hk.co.kr

■美선 교차로마다 황단보도

보행권은 1970년대 네덜란드, 독일 등에서 논의가 제기돼 이제는 도시미화 및 환경과 연계된 포괄적인 기본권으로 자리잡았다.

미국의 경우 교차로에는 무조건 횡단보도를 설치하고 있다. 영국에서는 횡단보도 근처의 차선을 지그재그로 만들어 감속을 유도한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횡단보도 설치의무에 관한 법률조차 없다. 대신 설치 금지조항(도로교통법 시행규칙 9조4항 ‘육교, 지하도 및 다른 횡단보도로부터 200㎙ 이내에는 횡단보도를 설치할 수 없다’)만이 존재한다. 국가가 보행권을 얼마나 무시하고 있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조문이다.

유럽과 북미에서는 오래전부터 정부의 노력 못지 않게 시민단체와 주민조직을 중심으로 한 보행환경 개선운동이 활발하다. 한국의 경우 녹색교통운동 등 55개 단체가 ‘보행권회복을 위한 전국네트워크’를 구성, 활동하고 있다.

정상원기자ornot@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