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재벌과 금융기관의 취약성을 지적하면서 이들 분야의 신속한 구조조정을 요구하는 보고서가 국내외에서 잇따르고 있어 주목된다. 금융 구조조정에 막대한 자금이 투입됐지만 몇몇 은행의 국제 신용등급은 오히려 떨어졌다. 미국의 신용평가기관인 톰슨 뱅크워치사가 조흥·한빛·외환은행의 원화표시 단기채권 신용등급을 외환위기 이후 처음으로 하향조정한 것은 가볍게 넘길 일이 아니다. 이에 앞서 세계적 신용평가기관인 무디스사도 ‘한국의 은행산업’에 대한 보고서에서 추가적인 구조조정을 강조했다.위기감이 확산되기는 안에서도 같다. 외환은행은 워크아웃이 제대로 진척되지 않는 상황에서 투신사 문제가 또다시 불거짐에 따라 금융부문에 대한 우려가 고조되고 있다며, 특히 최근 ‘은행압력지수’를 점검한 결과 97년 한보사태 당시와 비슷한 수준이었다고 경고했다. 한국은행도 비슷한 분석을 했다.
정부는 우리 경제가 위기가 아니라는 점을 계속 강조하고 있지만, 시장에서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이 문제다. 이헌재 재정경제부장관은 어제 KBS 일요진단에 출연, 실물경제의 견조한 상승세와 물가 안정세를 볼 때 경제위기는 다시 없다고 밝혔다. 이 자리에서 이 장관은 의미있는 발언을 했다. “구조조정을 계속하는 가운데 현대투신이나 현대지배구조 등과 같은 돌출사건만 일어나지 않고 재정안정과 적정환율을 유지하면”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현 상황을 보면 이 장관의 이 발언이 말 그대로 실현되기에는 앞으로 거쳐야 할 과정이 얼마나 험난할 것인지 짐작하기도 어렵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상이라고 분류됐던 새한그룹의 워크아웃 신청이 시중에 자금난을 겪고 있는 중견기업들에 대한 악성루머를 촉발시킨 것도 위기상황의 하나다. 환율과 금리는 급등하고 증시는 침체에 빠지는 등 금융시장은 극심한 불안상태에서 좀처럼 벗어날 기미를 보이고 있지 않다. 또 유엔 아시아·태평양 경제사회이사회(ESCAP) 보고서가 한국은 급속한 성장으로 세수가 증가할 것이지만 더욱 큰 폭으로 늘어나는 공공부채를 감당하기 힘든 수준이라고 지적했듯이, 곳곳에 암초가 즐비한 것이다.
정부는 우선 금융기관 부실 정도에 대한 정확한 실상을 공개해야 한다. 정부는 금융기관 등의 부실규모 발표가 시장불안을 가속화시킬 우려가 있다며 구체적인 내역을 밝히지 않고 있으나, 이런 투명하지 않은 행동이 오히려 시장불안을 심화시키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정부는 왜 시장이 정부를 신임하지 못하는지 겸허하게 반성해야 한다. 정확한 분석과 대응, 국민들의 이해와 신뢰를 구할 수 있는 정책이라야 이 어려운 시기를 헤쳐나갈 수 있다. 더이상의 실기(失機)나 자만(自慢)은 없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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