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롤백과 전쟁의 확대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인해 인민군은 완전히 지리멸렬 상태에 빠졌다. 1950년 9월27일 북한에 파견된 스탈린의 군사연락관 마트베에프(A.I. Matveev)장군은 미군의 지속적인 공습으로 인민군은 거의 모든 탱크와 대포를 상실했고, 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는 운송수단의 부족으로 후퇴작전도 심각한 위협에 직면했다고 스탈린에게 보고했다.
또 그는 인민군은 심각한 군사물자 및 연료 부족을 겪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상부와 하부 지휘부를 연결하는 군사지휘체계와 통신도 완전히 무너졌다고 지적했다. 이런 문제점들을 해결하기 위해 1950년 9월26일 김일성이 총사령관과 국방상을 겸하는 결정이 이뤄졌지만, 유엔군 공세에 대응하기 위한 인민군 병력의 증강과 재조직과정에는 많은 어려움이 뒤따랐다.
우선 남한지역 내에서 9개의 인민군 예비사단을 조직하려던 시도는 인천상륙작전으로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고, 북한지역내에서 불과 6개 인민군사단의 구성이 최근 시작되었을 뿐이었다.
마트베에프의 비관적 전황보고를 접한 스탈린은 인천상륙작전이 가져올 심각한 군사전략적 결과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소련군사고문단을 질책했다. 심지어 북한주재 소련대사 스티코프(T.F.Shtykov)는 인천상륙작전을 프라우다지에 보도한 소련기자를 재판에 회부해야 한다고 할 정도로 전략적 무지를 드러냈다고 스탈린은 비판했다.
그는 서울지역 전선에 배치된 인민군 4개 사단을 철수시켜 유엔군 공세에 대한 방어대책을 마련했다면 최소한 7일 정도는 유엔군의 공세를 지연시키고 인민군의 재조직에 필요한 시간적 여유를 확보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나아가 스탈린은 탱크의 배치가 사전 포사격이 진행된 이후에 이루어지지 못함으로써 탱크부대의 완전한 손실을 초래했다는 전술적 실수를 비판했다.
불리한 전황을 만회하기 위해 스탈린은 후방에 배치된 부대를 전면에 투입해 대항하면서 주력부대를 빨리 체계적으로 북한지역으로 철수시키라고 소련군사고문단에게 지시했다. 이와 더불어 그는 소련의 한국전쟁 개입을 은폐하기 위해 단 한명의 소련군사고문도 절대로 포로로 잡혀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분명히 했다.
소련군사고문단과 인민군 지휘부의 지리멸렬상태와는 달리 1950년 9월30일 현재 맥아더가 이끄는 유엔군 병력은 약 23만명에 달했고, 여기에는 6개의 미군 사단을 비롯한 약11만 3,000명의 미군병력이 포함돼 있었다.
트루먼은 인천상륙작전 직전 제82공수사단을 제외하고 미국 본토에서 동원 가능한 모든 전투사단들을 맥아더에게 증원시킴으로써 김일성의 무력통일론을 역이용해 남한을 적화시켜 미국과의 냉전대결에서 결정적인 승기를 잡으려는 스탈린의 의도를 좌절시키겠다는 단호한 의지를 보여주었다.
인천상륙작전과 같이 단번에 전세를 역전시키는 구체적 전략구상은 맥아더만이 갖고 있었지만, 미국이 한국전쟁 개입 후 인민군의 남진속도를 지연시키고 교두보를 확보한 뒤 대대적인 공세로 전환해야 한다는 일반적인 구상은 미국의 고위 정책결정자들도 대부분 갖고 있었다.
미국이 4개 사단을 투입한 뒤인 1950년 7월 17일 트루먼은 인민군이 38선 이북으로 패퇴하여 밀려난 후 미국이 추구해야 할 정책을 마련하도록 국가안보회의(NSC)에 지시했고, 이 문제는 즉시 국가안보회의 산하의 참모진에게 넘겨져서 구체적인 안들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은 미국의 38선 돌파를 개념적으로 규정하기 위해 ‘롤백(rollback)’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롤백의 사전적 의미는 특정지역을 장악하고 있는 세력을 그 지역으로부터 군사력을 포함한 여러 가지 수단을 동원해 몰아내거나 격퇴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롤백이라는 개념은 제2차 세계대전후 전세계가 미국과 소련의 세력권으로 양분되고 미·소 냉전대결이 심화하면서 미국의 대소(對蘇)전략을 설명하기 위해 원용되기 시작했고, 한국전쟁 당시 미국이 38선을 넘어 소련의 영향권하에 있는 북한을 군사적 수단을 동원해 제거하려는 정책을 설명하는데 구체적으로 사용되었다.
소련의 세력권이 더 이상 팽창하지 못하도록 미국과 소련의 세력권이 만나는 경계선 내에 소련을 묶어두어야 한다는 봉쇄정책이 수동적인 정책이었던 반면, 롤백정책은 봉쇄선 너머로 공격해 들어가서 북한을 소련의 영향권으로부터 떼어낸다는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정책을 의미했다.
미국은 북한이 한반도에서 전쟁을 다시 일으키지 못하도록 확실한 조치를 취하기 위해 38선을 돌파해야 한다고 보았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인민군을 완전 무장해제시키고 해체해야 하는데 군사작전의 범위를 38선 이남에만 국한시켜서는 이 목적을 달성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인민군은 북한지역으로부터 계속적으로 군사물자를 보급받을 수 있고 유사시에는 북한지역으로 이동해 전열을 재정비하고 재반격을 가할 수 있는 계기를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아가 인천상륙작전과 같은 대규모 작전을 통해 전쟁의 결정적 승기를 잡은 시점에서 인민군이 38선 이북으로 도피하도록 그냥 내버려두는 것은 군사작전의 계기를 상실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미국은 38선이 더 이상 인민군에게 도피처를 제공하는 선으로 이용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대(對)북한 롤백정책을 추구해야 한다고 보았다.
미국은 또 한국전쟁이 소련의 궤도를 돌고 있는 위성국가를 소련 영향권으로부터 제거할 수 있는 기회로 보았다. 미국은 대북한 롤백정책을 통해 소련의 도움하에 성립된 북한을 소련의 영향권으로부터 떼어냄으로써 소련의 위신에 심대한 타격을 가하고자 했다.
나아가 대북한 롤백정책의 성공은 아시아에서 소련의 팽창정책이 저지되었다는 것을 일본과 서방국가들에게 보여줌으로써 이들이 대소(對蘇) 경사정책을 추구하기보다는 미국과의 동맹을 통해 자국의 안전을 확보할 것이라고 보았다.
결국 미국은 군사적 필요성, 소련 위신에 대한 타격, 일본과 서방 동맹국들에게 끼칠 긍정적인 효과 때문에 대북한 롤백정책을 결정하게 되었고, 이러한 결정은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기 이전인 1950년 9월11일 국가안보회의 문서NSC 81/1)의 형태로 트루먼의 승인을 받았다.
미국 정책결정자들 중에서 미국의 대북한 롤백정책이 갖고 있는 위험성을 경고한 유일한 인물은 대소봉쇄전략의 주창자인 케난(George F. Kennan)이었다. 케난은 미국이 38선을 넘어 만주국경으로 롤백을 추구하는 것은 한국전쟁 직전 중소군사동맹조약을 통해 스탈린이 만들어 둔 만주-북한-연해주를 잇는 거대한 전략적 지대라는 덫에 가까이 가는 것일 뿐만 아니라 완전히 불확실한
세계로 빠져드는 것이라고 경고했다. 또한 그는 스탈린도 앉아서 기다리고 있지 않고 모든 수단을 동원, 강력하게 대처할 것으로 보고, 38선 상에서 북진을 일단 정지하고 소련의 의중을 탐색하는 것이 더욱 신중한 정책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그의 제안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승리의 기분에 도취돼있던 미국 정책결정자들 사이의 분위기를 바꾸어 놓을 수 없었다.
◆미국의 롤백 감행
마트베에프가 스탈린에게 비관적인 전황을 보고한 시점과 같은 날짜인 1950년 9월27일 미 합참은 맥아더에게 롤백에 관한 지침을 하달함으로써 미국의 롤백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합참은 맥아더가 북한지역에서 행할 군사작전 계획을 합참에 제출하도록 했다.
합참이 승인한 맥아더의 작전계획은 북한을 두 지역으로 나누어 군사작전을 감행하는 것이었다. 미 제8군은 서울에서 평양으로 이르는 서부지역에서 롤백을 추구하고, 미 제10군단은 원산에서 상륙작전을 시도하여 동부의 함경도지역을 장악할 계획이었다. 하나의 전쟁터에 동원된 군대의 지휘계통을 이원화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원래 제8군 사령관 워커는 제10군단을 자신의 휘하에 두어 단일 지휘계통을 확립하여 북진을 추구하기를 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맥아더는 서울에서 평양으로 진격하여 평양지역에서 원산으로 병력을 파견하고 물자를 보급하는 것이 한반도의 지형상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다.
따라서 제10군단을 도쿄에 사령부를 둔 극동사령부 지휘하에 둔채 인천항에서 함정을 통해 군단병력을 원산으로 이동시키고 물자는 일본에서 해상을 통해 직접 보급하는 방안을 강구하게 되었다. 나아가 맥아더는 원산항에 병력을 상륙시켜 후퇴하는 인민군을 재빨리 차단하고 한반도의 동북부지역을 장악함으로써 미국의 롤백을 완수하고자 했다.
그러나 제10군단이 작전명령을 받고 병력과 장비를 인천항에서 싣고 원산으로 출발하는 데에만 2주일 이상이 소요되었다. 이미 스탈린은 소련군사고문단에게 지시해 인천에서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원산항에 약 2,000개의 기뢰를 설치하도록 지시했다.
제10군단은 10월19일 원산 앞바다에 도착했지만 기뢰 제거에 시간이 지체되어 일주일간을 원산 외항에 떠 있지 않으면 안되었다.
미군의 선발대가 10월26일 원산항에 상륙하기 시작하여 다음날 주력부대가 상륙했다. 그보다 훨씬 이전인 10월10일 국군 제1군단이 원산을 이미 탈환했기 때문에 뒤늦은 미국의 상륙작전은 이 지역에서 그다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9월29일 서울환도식에서 만난 맥아더로부터 북진에 대한 아무런 언질을 받지 못한 이승만은 국군 수뇌부에 국군 단독으로 북진을 감행할 것을 지시했다.
국군 제1군단 휘하의 제3사단은 이승만의 명령에 의하여 10월1일 38선을 넘어 진격함으로써 최초로 38선을 돌파한 부대가 되었다. 한편 서부지역에서는 미제8군 산하의 제1기병 사단이 10월9일 38선을 돌파했다.
◆러시아·중국의 개입
스탈린은 한국전쟁 결정과정에서 마오쩌둥이 유사시에 한국전쟁에 개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남침 승인의 전제조건으로 내걸고, 이러한 마오쩌둥의 의사를 김일성으로 하여금 확인케 했다.
미국의 개입이 확실시된 1950년 7월초 중국이 만주국경에 배치된 중국군의 한반도 투입시 항공엄호를 요청했을 때 스탈린은 그러한 요구를 즉시 수용했다. 또 항공지원을 위하여 스탈린은 로보프(G.A. Lobov)중장이 사령관으로 지휘하는 소련 제303 항공방위사단 비행편대의 일부를 블라디보스톡으로 이동할 것을 8월말에 지시함으로써 한국전쟁 중 최초로 연해주지역 밖에 있는 소련 항공부대를 만주에 투입하기 시작했다.
이 항공부대는 제64 항공방위군단을 구성하고 11월 1일부터 본격적으로 한국전쟁에 참가하게 된다. 최근에 공개된 소련측의 문서는 1950년 11월 1일부터 1951년 12월 6일까지 소련 전투기가 510대의 미군 비행기를 파괴했고, 소련의 대공포가 59대의 미군기를 격추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 기간에 소련측은 63대의 미그15기와 30명의 조종사를 잃었다고 이 문서는 적고 있다. 중공군이 10월19일과 20일 밤 급히 설치된 나무다리를 이용해 압록강을 도하한 후 운산 일대의 산악지역에 잠복해 있다가 10월25일 제1차 기습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중국의 개입이 본격화하였고, 한국전쟁은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김영호(성신여대 정외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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