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비비를 가리는 건 중요한 일이지만 무 자르듯 쉽지는 않다. 이 쪽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 쪽이 맞는 것 같고, 저 쪽 이야기를 들어보면 저 쪽이 맞는 것 같아 때로는 ‘양시론’이, 때로는 ‘양비론’이 등장하게 된다. 또 어떨 때는 ‘문제제기’라는 구실로 양쪽 이야기가 함께 소개되기도 한다. ‘판단은 독자에게 맡긴다’는 말과 함께.얼마전 용인 노인 한 분이 기자를 찾아왔다. 자신을 올해 예순 일곱으로 용인(龍仁) 이(李)씨 사맹공(司猛公)파 종친회 회장을 맡고 있는 이호현(李鎬鉉)이라고 밝힌 그는 “시집 간 딸들은 시집을 간 집에서 권리를 찾아야 한다. 친정에서 권리를 찾으려면 사회적 모순이 일어난다”는 주장을 펴고 떠났다.
용인 이씨 사맹공파는 종중재산을 처분한 돈을 남자중심으로 분배했다는 이유로 출가한 딸들로부터 제소된 문중이다.
-“여자들은 시집간 집에서 권리를 찾아야 한다”는 말의 뜻은 무엇인가.
“시집간 딸들이 친정 문중재산을 남자들에게 준 것처럼 나눠달라는 요구는 부당하다는 말부터 해야겠다. 친정의 상속재산이라면 오빠나 삼촌들에게 나눠달라고 할 수 있겠지만 우리가 처분한 재산은 우리 문중이 몇 백년 가꿔온 문중재산이다. 시집 간 딸들이 문중을 위해 하는 일이 있다고 보는가.
또 딸들은 시집을 가면 시집을 위해 일하지 않나. 그래서 시집 간 집에서 권리를 찾으라고 한 것이다. 이건 여성차별과는 다른 문제다.”
"친정서 권리찾으면 사회적 관례 무너진다"
-“여자들이 친정에서 권리를 찾으려면 사회적 모순이 생긴다”고 했는데 무슨 뜻인가.
“우리는 남자들만을 종친회회원으로 인정해온 사회적 관례가 중요하다고 본다. 출가한 딸들에게 문중재산을 나눠준다고 해보자. 그건 관례를 깨고 출가한 딸들도 종친회 회원임을 인정하는 것인데, 그렇다면 시집가서 이미 돌아가신 고모나 대고모 분들은 어떻게 되나.
원칙적으로 그들도 종회회원이었으므로 문중재산을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렇게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 시조때부터 출가한 분들의 자손들도 우리 문중재산을 요구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수백년 내려온 사회적 관례가 뒤집어지는 게 사회적 모순이 아니고 무엇인가. 벌써 그런 요구를 하는 사람들도 있고….”
"돌아가신 고모 후손도 돈달라고 아우성"
-그런 요구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무슨 말인가.
“문중재산을 판 돈을 적게라도 출가한 딸들에게 준 데는 우리 용인 이씨 사맹공파 뿐이다. 그런데 얼마전 돌아가신 고모 한 분의 후손들이 ‘우리 어머니도 용인 이씨 사맹공파 후손이다.
돌아가시지 않았더라면 우리 어머니도 돈을 받았을 것’이라며 돈을 달라고 나섰다. 주면 되지 않느냐고 할 수 있겠지만 거기서 끝이 난다고 할 수 없으니까 문제가 되는 것이다.”
-시집간 딸들에게는 돈을 나눠주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이라는 말인가.
“그렇다. 문중임야가 아파트부지로 팔린 곳이 용인에만 15개 문중이 된다. 그 중에서 출가한 딸들에게 돈을 준 곳은 우리 밖에 없다. 그것도 처음엔 ‘줘서는 안 된다, 주더라도 조금만 주자’는 말이 있었지만 ‘시집을 갔어도 용인 이씨다. 이왕 주려면 보탬이 될 만큼은 주어야 되지 않느냐’는 의견이 더 많아 종친회에서 증여세를 물고 1인당 2,000만원이 돌아가게끔 한 것이다.
그런데도 돈이 적다고 저렇게 소송까지 냈으니 차라리 다른 문중처럼 나눠주지 않았더라면 하는 생각도 든다. 아니면 ○○문중처럼 호주에게 돈을 주고 호주의 뜻에 따라 딸들에게 주든지 말든지 하는 형식을 취했으면 우리처럼 종친회가 욕을 먹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출가딸들에 돈준 곳은 그래도 우리문중뿐인데..."
-소송을 낸 분들은 자신들이 받은 돈이 남자들이 받은 돈과 차이가 많을 뿐 아니라 용인 이씨 집안으로 시집온 사람들보다도 적다고 주장하는데 그렇게 차이를 둘 필요가 있었나?
“되풀이되는 이야기지만, 이번에 분배한 재산은 문중재산이다. 문중재산은 그 문중발전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 것인데 우리가 시집간 딸들에게 이 재산을 나눠주는 게 우리 문중발전을 위해 도움이 되나. 예를 들어 최씨 집안으로 시집간 딸이 있다고 하자. 그 딸이 받은 돈은 결국 최씨문중을 위해 사용될 것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딸들에게 돈을 나눠준 것은 우리 문중이 그나마 딸들을 배려한 것이라고 봐야 하는 것 아닌가. 며느리들에게 돈은 더 준 것은 우리 집안으로 시집온 며느리들은 우리 식구라는 차원에서 봐야 한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시집간 딸들은 그 집에서 대접을 받고, 그 집안에서 대접을 해줘야 하는 것이다. 또 출가한 사람들이 시집에서 유산을 물려받는다고 하자, 그걸 친정식구들과 나누는 경우가 많다고 보나?” 그는 이어서 딸들과 며느리 중 누가 조상을 받드느냐고 물었다.
일년에 몇 차례 조상을 위한 시제(時祭)를 지낼 때 시집간 딸과 며느리중 누가 온갖 준비와 뒤치닥거리를 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결혼안한 남녀에도 차별둔 것은 잘못인정"
-출가한 딸들에게 돈을 덜 준 것은 남녀차별의 문제가 아니라고 하는데 그렇다면 10세 이상 19세까지 남자들에게는 5,000만원씩 준 반면, 10세 이상 미혼 여자들에게는 3,000만원만 준 것은 남녀차별 아닌가.
“시집 안 간 딸들은 우리 식구다. 우리가 돌볼 책임이 있다. 혼수비용을 하라고 준 것인데…. 하지만 남자아이들과 차이를 둔 건 지금 생각하니 문제가 있는 것 같다.”
-아예 돈을 후손들이 나눠갖지 않았으면 이런 문제가 생기지 않았을 터인데.
“그럴 수는 없었다. 우리는 종중임야를 판 후 우선 조상을 모실 자리를 구했다. 네 곳에 24만평을 매입해 조상들을 모실 묘역을 마련하고, 사찰이 있는 산도 사들여 매년 천도제를 지내기로 하는등 부끄러운 후손이 되지 않도록 준비를 다 해두었다.
그러고도 돈이 남아 은행에 예치하는 것도 생각해봤는데 앞으로 무슨 사고가 일어날지 몰라 후손들이 나누기로 결정을 한 것이다. 부끄러운 말이지만 30년 전, 용인자연농원-에버랜드-이 조성될 때도 문중 임야 3만평을 팔았는데 그때 누군가가 매각대금에 손을 대 집안이 아주 시끄러운 적이 있었다. 그런 일이 되풀이되느니 나누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한 것이다.”
● 무엇이 문제인가
문중재산 분배 차별에 출가딸들 소송
용인 이씨 사맹공파 문중에 문제가 생긴 것은 지난 해 4월 종친회가 문중임야 3만여평을 모 건설업체에 아파트부지로 매각한 후 그 대금을 남자중심으로 나누면서부터. 종친회는 매각대금 중 300억원중 일부는 문중위토를 다시 사는데 사용하고 나머지를 사맹공파 후손들에게 나눠주었다.
나눠준 내역은 20세 이상 남자에게는 1억5,000만원, 10세 이상 19세까지 남자에게는 5,000만원, 시집간 딸들에게는 2,000만원, 10세 이상 미혼여성에게는 3,000만원, 1세 이상 9세까지는 남녀구별 없이 1,500만원씩이었다. 또 얼마후에는 문중으로 시집온 사람들(며느리)에게도 3,000만원씩 나누기로 했다.
매각대금을 이렇게 나누기로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출가한 딸들이 반발하고 나섰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반발하고 나선 딸들의 대표 이원재씨(李源在·59)는 재산분배를 결정했을 당시 종친회장의 동생이다.
이씨는 대부분의 가정에서 딸들이 오빠나 남동생들을 위해 희생하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남자중심으로 재산을 분배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은 종친회와 협상(?)이 결렬되자 4월초 수원지법에 종친회를 상대로 ‘종회회원 자격확인 소송’을 제기했다. 이들은‘용인 이씨 사맹공파 회원은 20세 이상 성인에 한한다’는 종친회 규약에 따라 시집간 여성도 회원임이 당연하며, 종친회가 20세 이상 남자들을 회원으로 인정해 1억5,000만원씩 분배한 것처럼 자신들에게도 그 정도 액수를 지급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원고측 소송대리인인 황덕남(黃德南·여)변호사는 “이 소송은 돈 때문에 제기된 것이지만, 판결에 따라 가정에서의 여성의 지위가 재정립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한 재판”이라고 보고 있다.
● 이인상 종친회총무
이호현씨와 함께 온 이인상(李麟相·65)종친회 총무는 “큰 벼슬은 못했지만 수 백년을 반듯하게 내려온 집안이 어쩌다 이런 창피를 당하게 됐는지 모르겠다”며 내내 혀를 찼다.
용인 이씨는 고려개국공신 태사공 길권(吉卷)으로부터 비롯된 집안. 고려때는 크게 번성했으나 조선이 개국하면서 구성부원군 중인(中仁)으로부터 3대가 벼슬을 거부하는 바람에 명문거족의 반열에서는 빠지게 되었지만 예의범절이 엄하고, 뼈대 있는 가문으로 이어져왔다.
“고려때 조상 묘소는 실전됐지만 중시조 이후 20대 선조분들의 묘소는 한 분도 빠뜨림없이 반듯하게 모셔왔습니다. 이렇게 문중에서 조상을 모시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후손들이 그나마 행세를 하고 살았겠습니까.”
세종때 분파된 사맹공파는 종회회원(20세이상 남자)이 157명에 불과하고 출가한 식구까지 합해도 500여명에 지나지 않는다. “자손이 귀한 탓에 시제를 지낼 때면 언제나 100명 이상은 모여 음식을 나눠먹고 우애를 다져왔는데…”이씨는 돈문제로 후손들이 남녀로 나뉘어 서로 얼굴을 붉힌 데 이어 좋지 못한 일로 집안이름이 언론에 등장하는 등 조상 뵐 면목이 없다는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
용인이 아파트단지로 개발되지만 않았더라면 이런 일이 없었을 것이라며 한숨을 쉬던 이씨는 “어쨌든 법원에서 우리 사회의 기본틀이 되고 있는 관례를 뒤집는 판결은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정숭호 ?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