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의 전자책(e-북) 발전방향'심포지엄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열린 17일 오후 2시 서울 중구 태평로 프레스센터 20층 국제회의장. 행사를 준비한 한국출판연구소 관계자들은 열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행사 시작 1시간여 전부터 사람들이 몰리기 시작, 350개 좌석과 복도, 장내 뒷편은 물론 로비에 마련된 전시장까지 가득 메웠기 때문이다.노년의 한 출판사 사장은 “출판 심포지엄에 이렇게 사람이 많이 모인 것은 10년 내 처음”이라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e-북 혁명이 시작됐다. 먼 외국의 얘기가 아니다. 종이책의 질감과 감성을 애지중지하던 기존 출판사 사장들에게 e-북 혁명은 이미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몸에 박혔다.
구텐베르크가 신약성서를 인쇄, 일반 신도들에게 복음을 전파한 지 550여년 만에 전혀 다른 출판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국내 e-북 혁명, 어디까지 진행됐나
문학과지성사, 창작과비평사, 문학동네, 이레 등 유수 출판사들이 참가한 와이즈북닷컴(www.wisebook.com)이 8일 유료판매를 시작한 이후 17일까지 4,000여 건의 다운로드가 이뤄졌다. 여기서 ‘다운로드’는 보통의 ‘다운로드’가 아니다. 책 한 권 볼 때 1,400원, 통째로 보관할 때 2,800원을 받는 엄연한 판매 행위이다. 5-7일 무료서비스 때는 무려 40만 건을 기록했다.
민음사, 중앙M&B, 청림출판사 등은 에버북닷컴(www.everbook.com)을 통해 7월부터 번듯한 전자책 판매를 시작한다. 현암사, 실천문학사 등이 참여한 북토피아(www.booktopia.com)는 ‘체 게바라 평전’을 시작으로 연내 2만 권을 제공할 계획.
김영사는 자체 인터넷 사이트(www.gimmyoung.com)를 통해 역시 7월부터 영화평론가 유진아의 영화비평 입문서 등을 전자책으로만 판매한다. 예스24닷컴(www.yes24.com)도 박상우 구효서 이순원 윤대녕 등 쟁쟁한 국내 작가들의 소설을 7월부터 전자책으로 출간한다.
■도대체 e-북의 매력이 뭐길래
전자책은 한마디로 ‘인터넷이나 전용 단말기를 통해 보는 갖가지 책’이다. 인터넷을 통한 전자책은 지금이라도 쉽게 접할 수 있고, 전용 단말기를 통한 전자책은 곧 국내에 판매된다.
이키온이라는 벤처기업이 만든 휴대용 단말기는 10월께 수첩만한 크기에 페이지 넘기기는 물론 밑줄 긋기와 검색 기능까지 갖춰 흑백 화면 20만원, 칼러 화면 60만원에 나올 예정이다.
출판사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제작비 절감과 제작기간 단축이 매력이다. 종이책의 경우 평균 제작기간 2개월에 3,000부 기준으로 2,000만원이 드는데 비해 전자책은 하루에 5만원이면 충분하다. 90%까지 절감된 제작경비는 곧바로 독자에게 돌아온다. 종이책에 비해 30-70% 싼 값으로 읽을 수 있다.
기술발전 속도를 감안하면 진짜 종이책처럼 가볍고, 화장실에 가서도 볼 수 있는 전자책이 출현할 날도 멀지 않았다.
■e-북의 미래는 온통 보랏빛일까
우선 전자책의 저작권 보호 문제. 미국에서 3월 14일 인터넷에 올라 하루 40만 건이 다운로드된 스티븐 킹의 ‘총알 올라타기’는 불과 이틀 만에 암호가 풀려 무료 사이트까지 생겼다.
독자가 자신이 읽은 전자책을 프린트해 친구들에게 돌리거나 인터넷에 띄우면 그 순간 유료 사이트는 끝장이다. 이는 출판사의 판매 이익과도 직결된다.
서울대 컴퓨터공학과 박근수 교수는 “아무리 철저하게 구성된 보안체계라도 해킹을 막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단 복제에 대한 경고 수준을 넘어 복제된 컨텐츠는 원천적으로 사용할 수 없는 방안이 나와야 한다”고 말했다.
동국대 기계공학과 임중연 교수는 “오프라인으로 운용되는 전용 단말기야말로 보안과 저작권 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유일한 대안”이라고 강조했다.
제작의 표준화 문제도 걸림돌이다. 제작 포맷이 동일하지 않다면 다른 출판사의 전자책을 볼 때마다 다른 소프트웨어(뷰어)를 설치해야 하기 때문이다. 미국은 지난 해 9월 전자책 제작의 표준안인 ‘OEB(Open e-Book)’을 만들었다. 한국기술표준원 최금호 전자정보표준과장은 “국내 기업들이 자유로운 포럼을 통해 전자책 언어와 동영상에 대한 표준안을 만들 것”을 제안했다.
■e-북에 대한 조금은 색다른 견해
1997년부터 PC통신과 인터넷을 통해 무협지 만화 판타지물 등을 서비스해오고 있는 바로북닷컴(www.barobook.com)의 이상운사장은 전자책에 대한 독특한 견해를 밝힌다. “현재 디지털북은 기존 출간물을 대상으로 할 수밖에 없다.
이 경우 구간(舊刊)을 새로 컴퓨터에 입력하는 데 1권에 입력비 교정비 등 20만원이 든다. 또한 3년여 동안 다운로드된 40만 건 중 우리가 흔히 ‘양서’라 불리는 베스트셀러는 고작 1% 판매에 불과했다. 그만큼 디지털북 시장은 편식현상이 심각하다. 이를 고려하지 않은 마케팅은 환상에 불과하다.”
그러면 종이책의 미래는
‘종이책의 미래’쪽으로 오면 출판사들은 더욱 갈팡질팡한다. 작가들이 전자책 업체와 직접 계약할 경우 자신들은 순식간에 외톨이가 된다는 두려움이다. 이는 종이책 시장의 축소를 의미한다.
물론 아직까지는 ‘전자책과 종이책을 함께 펴내는 출판사’로 변모할 것으로 보는 게 지배적인 견해이지만 말이다.
지경사 김병준 사장의 지적이다. “현재 추세로 볼 때 2004년이 되면 전자책은 전체 시장의 20% 정도를 차지할 것이다.
하지만 거대 자본이 전자책 단말기 제작에 참여할 경우 기존 출판사들은 졸지에 공중에 떠버릴 수 있다. 여기에 기존 저자가 오로지 단말기업체와 계약할 경우 출판사와 인쇄소, 제본소, 서점에 불어닥칠 바람은 그야말로 메가톤급 태풍이다.”
김관명기자
kimkwmy@hk.co.kr
■휴대용 단말기로 '독서에서 메일까지'
전자책 기술은 어디까지 왔나? 우선, 컴퓨터를 통해 보는 방법은 이미 보급됐다. 와이즈닷컴(wisebook.com)이나 예스24닷컴(yes24.com) 등 전자책 서점에서 제공하는 전자책 뷰어(viewer)를 다운로드 받아 설치한 후 뷰어를 통해 전자책 파일을 열어 보면 된다.
하지만 이 것은 화장실에서도 볼 수 있는 종이책의 휴대성을 뛰어 넘지는 못한다.
작고 가벼운 전자책 전용 단말기(reader)의 등장이 이런 난점을 해소시켰다.
미국에서는 1990년대 초반 전자책에 대한 관심이 폭발하면서 로켓 e북, 소프트 북, 글래스 북 등이 단말기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단말기가 크고 무겁다는 점 때문에 외면받았지만, 점차 단행본 크기와 비슷하게 작고 가벼워지고 있는 추세다.
국내에서는 ㈜이키온이 11월 출시를 목표로 단말기 생산을 한창 준비중이다. 가격은 흑백 20만원, 칼라 50만원 정도. 단행본 크기에 가깝고 무게는 1㎏미만으로 예상한다. ㈜이키온은 “기존 단말기 무게의 대부분이 배터리 무게였다. 저전력 기술을 이용, 획기적으로 무게를 줄였다”고 말했다.
또 하나의 난점이던 해상도 문제도 급속히 해결되고 있다. 마이크로 소프트는 이미 2년 전 종이책 활자에 버금하는 새로운 폰트 시스템 기술을 개발했다.
휴대용 독서단말기는 종이책이 구현할 수 없는 동영상, 음악, 음성을 듣고 볼 수 있다. 여기다 수백권의 책을 담을 수 있고, 터치펜으로 직접 스크린 위에 메모도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휴대폰과 연결하면 인터넷에 접속해 e메일을 띄우고 문자메시지도 전송한다. 물론 게임도 할 수 있다. 작은 컴퓨터로 봐도 무방하다. 이제 지하철에서 단말기 하나를 가지고 문자메시지를 띄우거나 게임을 하거나 책을 읽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을 것 같다. 독서문화에 일대 혁명을 예고하는 것이다.
남은 문제는 보완문제와 전자책 파일 포맷의 표준안 마련이다. ㈜이키온측은 “복제가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제품을 준비중”이라며 “복제 불가능한 파일 포맷을 바탕으로 전자책 파일 포맷의 표준안 마련이 시급하다”고 주장했다.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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