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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바다에 우리가 사네] (26) 찻잔속의 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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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과 바다에 우리가 사네] (26) 찻잔속의 낙원

입력
2000.05.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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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원은 한모금의 茶속에 존재한다화개(花開·경남 하동군 화개면)는 꽃피는 땅이다. 그 골짜기에서 꽃들이 지천으로 피어나기도 하지만, 꽃이 없더라도 그 땅은 이미 꽃으로 피어난 마을이다. 세상이 아닌 곳으로 가려는 사람의 마음을 끌어들여서, 이 골짜기에서는 신령한 일들이 많았다. 낮은 포근하고 밤은 서늘해서 늘 맑은 이슬이 내린다. 이슬을 맞고 차나무가 자란다. 봄에 이 나무의 새순을 다려 먹으면 마음이 가벼워진다. 옛 글에는 ‘두 겨드랑이 밑에서 서늘한 바람이 인다'라고 적혀있다(동다송).

섬진강 화개나루에서 북쪽으로 벚나무 숲길 십리를 가면 쌍계사다. 쌍계사는 두 물줄기 사이다. 육조 혜능의 머리가 이 절에 안장되었다. 절 마당에 1,200년 전의 비석이 서 있는데, 그 비문에 이르기를 “무릇 도(道)는 사람을 멀리하지 않고 사람은 나라를 가리지 않는다”라고 하였다(진감국사대공탑비). 글 읽는 후인들이 그 문장을 두려워한다. 쌍계사에서 다시 북쪽으로 십 리를 가면 칠불암이다. 이 절은 반야봉 중턱의 양지 바른 언덕 위다. 인도에서 시집 온 가락국 허황후의 일곱 아들이 이 언덕에서 성불하였다(삼국유사). 여기는 늘 양명(陽明)해서 음습한 그림자가 없고 벌레나 잡것이 얼씬거리지 않는다.

칠불암에서 동쪽으로 산길 삼십 리를 가면 청학동(靑鶴洞)이다. 청학동은 깊은 산 속의 맑은 땅이다. 안개를 마시며 개울물을 퍼먹고 사는 신선들이 모여있고, 푸른 학이 깃든다고 하는데, 아직 보았다는 사람은 없다. 고려 때 노인들의 말로는 “길이 협착하여 사람이 겨우 다닐 수 있고 몸을 구부리고 수 십 리를 가면 넓은 땅이 나타난다. 푸른 학이 살며, 옥토가 가시덤불에 덮혀 있다”고 하였다(파한집). 칠불암에서 청학동에 이르는 삼십 리 산길은 외지고 가파르다. 길은 끊어진 듯 이어지고, 이어진 듯 끊어져서 종잡을 수 없다. 잎이 우거진 여름이나 눈 쌓인 겨울에 길은 보이지 않는다. 청학동으로 가는 길은 찾기 어렵다. 고려때 문인 이인로(李仁老·1152-1220)는 이 꼴같지 않은 세상을 단칼에 끊어버리기로 하고, 소 두어 마리에 짐을 싣고 청학동을 찾아나섰다. 그는 구례 쪽 코스로 해서 화개 골짜기까지 왔었는데 청학동을 찾지는 못하였다. “신선은 없고 원숭이만 운다”라고 바위에 써놓고 그는 돌아왔다(파한집). 300여 년 후에 조선시대 도학자 김종직(金宗直·1431-1492)이 다시 청학동을 찾아나섰다. 김종직은 함양에서 출발해서 마천골, 피아골을 거쳐 화개 골짜기로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그의 산행 코스는 매우 길었고, 수발드는 중들이 고생 많았다. 김종직은 청학동이라는 마을을 찾기는 찾았으나 그곳은 인간세계와 매우 가까운 곳이어서 여기가 거기인지 긴가민가하다가 돌아왔다(두류산기행). 또 그로부터 30년 후에 그의 제자 김일손(金馹孫·1464-1498)도 청학동을 찾아나섰다. 김일손은 진주에서 출발해서 반야봉을 거쳐서 화개 골짜기에 당도하였다. 그는 청학동을 찾아냈다. 청학동에서 그의 결론은 ‘청학동’이란 있는지 없는지 알 수 없고, 있다 하더라도 찾을 수 없고, 찾았다 하더라고 살 수는 없다는 것이었다(속 두류산기행). 옛 일들이 이러하니, 낙원에 대한 꿈은 후대로 내려갈수록 점차 깨어져 나가게 마련인 모양이다.

낙원을 증명하는 일은 낙원의 부재를 증명하는 일인 것 같기도 하지만, 화개 골짜기의 차나무 밭에서는 낙원을 증명하기 위해 애써 헤매지 않아도 되지 싶다. 청학동에 이르는 양쪽 골짜기는 온통 푸르른 차나무 밭이다. 곡우에서 입하 사이에 햇차의 향기는 바람에 실려 이골 저골로 밀려다닌다. 5월 차나무 밭의 냄새는 풋것의 향기가 습한 육질 속에 녹아있지만, 5월 찻잔 속의 향기는 이 육질이 제거된 향기다. 시(詩)는 인공의 낙원이고 숲은 자연의 낙원이고 청학동은 관념의 낙원이지만, 한 모금의 차는 그 모든 낙원을 다 합친 낙원이다. 5월의 찻잔 속에서는 이 접합부의 이음새가 드러나지 않는다. 꿰맨 자리가 없거나 꿰맨 자리가 말끔한 곳이 낙원이다. 꿰맨 자리가 터지면 지옥인데, 이 세상의 모든 꿰맨 자리는 마침내 터지고, 기어이 터진다. 차는 살아있는 목구멍을 넘어가는 실존의 국물인 동시에 살 속으로 스미는 상징이다. 그래서 찻잔 속의 자유는 오직 개인의 내면에만 살아있는, 가난하고, 외롭고, 고요한 소승의 자유다. 찻잔 속에는 세상을 해석하거나 설명하거나 계통을 부여하려는 논리의 허세가 없다. 차는 책과 다르다. 찻잔 속에는 세상을 과장하거나 증폭시키려는 마음의 충동이 없다. 차는 술과도 다르다. 책은 술과 벗을 부르지만 차는 벗을 부르지 않는다. 혼자서 마시는 차가 가장 고귀하고 여럿이 마시는 차는 귀하지 않다(동다송). 함께 차를 마셔도 차는 나누어지지 않는다.

차에 관한 초의(草衣·1786-1866)의 글들은 낙원이 없는 세상 속에 낙원을 세우기 위한 타협처럼 읽힌다. 그의 타협은 자연과 인간 사이의 소통이지만, 그 타협은 치밀하고도 부드러워서 인공의 흔적을 남기지 않는다. 그는 당대 최고의 선지식이었고 삼엄한 논객이었지만, 그보다 앞서 그는 아무도 따를 수 없는 멋쟁이 승려였다. 그는 이 세상의 모든 색깔과 모양과 맛과 냄새의 아름다움을 색즉시공의 이름으로 부정하지 않았다. 그에게, 한 모금의 차는 덧없는 세상의 일상성 속에서 구현되어야할 깨달음이었으며, 삶과 선(禪)은 서로 배척하는 것이 아니었다. 한 모금의 차 속에 그 양쪽이 다 들어 있다. 찻잎이나 찻잔, 물, 불, 장작, 숯, 화로, 탕기에 대한 그의 감식안은 때때로 범인이 이해하기에 지나치게 까다로워 보인다. 그의 까다로움은 자연의 본질을 훼손시키지 않고, 그것을 인간의 육신이 감지할 수 있는 국물로 정제해내기 위한 까다로움이다. 그리고 찻잔 속에서 그 까다로움은 소멸한다. 차에 관한 초의의 글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목은 그가 시간을 인간의 육신 쪽으로 끌어들이는 페이지들이다.

-겨울에는 찻잎을 주전자 바닥에 먼저 넣고 끓는 물을 붓는다. 여름에는 끓는 물을 먼저 붓고 물위에 찻잎을 띄운다. 봄, 가을에는 끓는 물을 절반쯤 붓고 찻잎을 넣은 다음 그 위에 다시 물을 붓는다-(다신전)

왜 그래야 하는지, 그렇게 해서 차맛이 달라지는지를 물을 수는 없지만, 그것은 왠지 그래야만 할 것 같다. 낙원은 일상 속에 있든지 아니면 없다. 청학동으로 가는 계곡에서 5월의 차나무 밑은 푸르다. 자전거는 청학동 어귀에서 방향을 돌려 화개 골짜기로 되돌아왔다.

● 손만이 아는 茶맛

5월 초순에 화개 골짜기에서는 우전(雨前)차가 나온다. 우전은 곡우 닷새 전에 딴 햇차로, 무릇 차의 으뜸으로 여긴다. 이것은 중국 사람들의 입맛이다. 조선의 차는 입하에 가까워져야 온전해진다고 초의는 말했다.

화개 골짜기에서는 올해의 햇차를 거두어들인 차밭 주인들이 저녘마다 이집 저집으로 마실을 다니며 차 맛을 다툰다. 이웃집 차를 마셔볼 뿐, 그 맛에 대해서는 내놓고 말하기를 조심스러워 하는데, 내심으로 서로 두려워하고 있다.

화개 골짜기의 차 밭은 야생종 차밭이다. 고산지대에서 나는 차를 특히 귀하게 여겨 이것만을 찾는 승려들도 있다. 흐린 날에는 차를 따지 않고, 날이 저문 뒤에는 차를 따지 않는다. 차를 따서 불에 말리는 과정이 ‘덖음’이다. 차맛은 이 ‘덖음’과정에서 크게 달라진다. 찻잎에는 독성이 있다. 그래서 차나무 밭에는 벌레가 없고, 놓아먹이는 염소들도 차나무 밭에는 얼씬거리지 않는다. 덖음은 차의 독성을 제거하고, 잎 속의 차맛을 물에 용해될 수 있는

상태로 끌어내고, 차를 보관 가능하게 건조시키는 과정이다. 그날 딴 차는 하루를 넘기면 안되고, 그날 안으로 덖음질을 마쳐야한다. 대체로 7-8번 덖음질을 한다. 무쇠솥에 찻잎을 넣고 두손으로 주물러가며 볶아낸다. 잠시도 손놀림을 멈추어서는 안된다. 덖음질을 오래한 사람들은 열 때문에 손마디가 구부러져 있다. 오랜 경험을 가진 사람의 손이 아니면 차가 익은 정도를 감지해 낼 수 없다. 불은 흔들려서도 안되고 연기가 나서도 안된다. 차의 계율은 삼엄하고도 섬세하다. 그것은 자연의 본질을 추출해내기 위한 인공의 과정이다.

편집위원 김 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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