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립된 땅. 광주의 금남로와 충장로는 피투성이가 된 대학생들과 시민들로 가득했고, 계엄군의 군홧발 소리와 총성이 끊이지 않았다. 1980년 5월, 광주는 이렇게 설움과 분노, 아픔으로 얼룩졌다.그로부터 20년. 5·18이 남긴 서로 다른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두 사람이 5·18묘역에서 17일 만났다.
5·18부상자회 대외협력국장 김재권(金在權·60)씨와 강원 횡성군 개전감리교회 이경남(李敬南·43)목사. 이 목사는 계엄군, 김씨는 시민군으로 한(恨)의 5월을 보냈다.
11공수여단 소속 진압군으로 투입됐던 이목사에게 ‘광주’는 지워버리고 싶은 기억이었지만 오월만되면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상처이기도 하다. 영문도 모른 채 광주에 도착한 이 목사는 피범벅이 돼 쓰러진 한 시민을 살리려다 부대를 이탈, 동료들로부터 “너는 적군”이라는 호통과 함께 죽도록 두들겨 맞았다. 그는 광주 송암동에서 퇴각하던 계엄군간 오인교전으로 총상을 입고 죽을 고비를 넘겼고, 아직도 파편 2개를 몸속에 넣은 채 살아가고 있다.
그는 꿈에도 희생자들의 모습이 떠올라 죄책감에 시달리다 지난해 겨울
계간지 ‘당대비평’에 그날의 끔찍함을 글로 고백했다. “20년만에 광주 땅을 밟습니다. 시체가 나뒹굴고 총성이 요란했던 그날의 기억이 생생합니다. 언젠가 용서를 빌어야한다고 마음 먹었지만 이제야 찾게 됐습니다”
이에 김씨는 눈물을 글썽이는 이목사를 부둥켜안고 “명령에 따라 행동한 사병이 무슨 죄가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 피해자입니다”라며 상처를 어루만졌다.
김씨는 5·18 당시 계엄군 5명에게 쫓겨 한 동사무소에 숨어들어갔다 발각돼 머리뼈가 튀어나올 때까지 진압봉으로 ‘개 패듯’두들겨 맞아 사경을 헤맸다. 이후 후유증으로 경영하던 식품대리점도 문을 닫았고, 한동안 얼룩무늬 공수부대원만 보면 가슴이 울렁거려 음식물을 입에 대지도 못했다.
이날 이들의 만남은 6시간동안 계속됐다. “광주에 와서 참회의 눈물을 흘리고나니 무거운 짐을 조금이나마 덜게 됐다”는 이목사의 말에 김씨는 “우리의 만남이 시대의 앙금을 씻어내고 용서와 화해의 시작이 될 수 있도록 하자”고 말했다.
그러나 이들은 “전두환씨등 유혈진압 책임자들은 웃으며 전국을 누비고 있다”며 “이들이 참회하고 용서를 구할 때까지 그 날의 진실과 아픔을 잊어서는 안된다”고 입을 모았다.
안경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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