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드러난 산청·함양학살사건 외에 또 다시 산청군 시천면 외공리와 점동 사이 계곡에서 남녀노소 수백명의 양민이 학살되었음이 알려졌다.”1960년 5월19일자 한국일보 사회면은 ‘또 드러난 10년만의 학살’이라는 제목으로 산청 외공마을 양민학살사건을 이렇게 보도했다.
당시 한국일보는 주민 증언과 현지 취재를 토대로 5월16일자부터 3일간 이 사건을 대대적으로 특종 보도했다. 그러나 서슬퍼런 군부와 ‘빨갱이’로 몰리는 것을 두려워 한 마을주민들의 함구(緘口)로 이 사건은 다시금 역사 속에 묻히는 듯 했다.
그러나 발생 50년, 보도 40년만에 현지 주민들의 노력으로 이 사건은 다시 역사의 양지로 드러나고야 말았다.
기자는 ‘지리산 외공 양민학살사건 진상규명 추진위원회’가 최근 유골 200여구를 무더기로 발굴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40년 전의 취재현장을 찾아 ‘속보(續報) 챙기기’에 나섰다.
양민들이 떼죽음 당한 50년 전 그날처럼 빗방울이 흩뿌리고 있었다.
당시 상황을 목격한 주민들의 증언이 때로는 오열 속에, 때로는 한숨 속에 이어졌다. “사람들을 가득 실은 버스가 마을로 들어온 뒤 군인들이 이들을 삼엄하게 포위한 채 마을 뒷산으로 끌고가 무차별 총격을 가했습니다” “어린아이와 노인들도 상당수 포함돼 있었어요” 등등.
추진위 관계자들과 주민들은 “이제는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한 목소리를 냈다.
“억울한 죽음도 모라자 유택(幽宅)조차 없이 나뒹굴고 있는 이들의 유골이라도 수습해 아픈 역사를 바로잡고 역사의 교훈으로 삼는 것이야말로 우리 세대의 몫입니다.”이들의 목소리에는 잊혀진 과거에 대한 분노만이 가득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국가가 문제를 적극적으로 합당하게 처리함으로써 역사를 의미있게 만들어야 한다는 촉구였다.
산청=이동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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