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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기행](27) 정호승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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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기행](27) 정호승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입력
2000.05.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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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령(竹嶺)을 넘어서자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했다. 충청북도 단양과 경상북도 풍기를 이어주는 죽령은 지금도 남한강 이북에서 영주 부석사(浮石寺)로 향하는 사실상 유일한 길이다. 영주는 경북의 오지다. 천삼백 년 전 신라에서 죽령의 관문을 지나면 고구려, 백제로 통했다. 소백산맥 산줄기에 드리워져있던 짙은 안개가 죽령의 구비구비를 적시고 있었다. 힘겹게 고개를 오르던 차도 빗줄기를 따라 이리저리 휩쓸렸다.“부처님께서 생일을 맞아 봄 가뭄 덜어주시려고 비를 내리시는 모양”이라고 정호승(50)시인은 말했다. 그는 4년여 만에 ‘그리운 부석사’를 찾아가는 길이다. 정씨의 시집 제목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는 시 ‘그리운 부석사’의 첫 구절에서 따왔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비로자나불이 손가락에 매달려 앉아 있겠느냐/ 기다리다가 죽어버려라/ 오죽하면 아미타불이 모가지를 베어서 베개로 삼겠느냐/ 새벽이 지나도록/ 麻旨(마지)를 올리는 쇠종소리는 울리지 않는데’

비로자나불은 불교 화엄사상의 본존불(本尊佛)이다. 부석사에는 2구의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다. 정씨가 찾아왔을 당시 부석사의 석조 비로자나불은 절 뒤편에 언덕의 산방 자인당에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무량수전 바로 옆 부석(浮石)의 곁으로 옮겨져 아미타불과 함께 노천에 비를 맞으며 있었다. 비로자나불은 왼손의 검지를 오른손이 감싸 안은 자세의 좌불이다. 정씨는 이 모습을 비로자나불이 자신의 손가락에 매달려 있는 것으로 보았다. 아미타불의 모습이 모가지를 베개로 삼았다는 구절도 같은 생각이다. 마지는 절집에서 올리는 공양을 말한다. 시적 화자인 정씨의 진술은 이 다음에 이어진다.

‘나는 부석사 당간지주 앞에 평생을 앉아/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지 못하고/ 눈물 속에 절 하나 지었다 부수네/ 하늘 나는 돌 위에 절 하나 짓네’

정씨는 “사랑한다는 것은 그대에게 밥 한 그릇 올리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대는 우리 모두, 누구나의 가슴 속에 살아있는 그런 대상이다.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는 구절은 불교잡지에서 읽은 어느 스님의 말씀입니다. 큰 충격이었지요. 죽음만한 무게와 깊이로 사랑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였습니다.”

1997년 그 이전 7년 동안 시를 쓰지 않다가 정씨가 낸 다섯번째 시집은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라는 충격적인 제목을 달고 있다. 시를 쓰지 않는 기간에도 이 구절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정씨는 이를 제목으로 고집했지만 출판사에서는 난색이었다. 결국 정씨의 고집대로 시집은 나왔고 지금까지 10만부가 넘게 팔렸다.

부석사 일주문을 지나기 전에 높이 4.5㎙ 정도 되는 당간지주(幢竿支柱)가 서 있다. 불전에 세워 부처와 보살의 공덕을 나타내는 기(旗)가 당(幢)이다. 죽령을 지나면서부터 시작된 능금밭에 활짝 피어난 능금꽃들은 천삼백 년의 풍파를 견디고 의연히 서있는 이 당간지주에 이르기까지 빗속에서 활짝 피어나 있었다.

석가탄신일을 맞아 부석사에는 많은 보살들(대부분 40대 이상의 아주머니들이지만 때로 자식들의 손을 잡고 찾아온 중년남자들의 모습도 보였다)이 저마다의 손에손에 연등을 들고 찾아와 있었다. 마침 내리는 비에 연등이 젖을까봐 절집 처마 밑에 앉아 무연히 빗줄기를 바라보거나 염주알을 굴리고 있었다. 이 보살들의 연등은 누구를 위한 공양인가. 이들이 가슴 속에 담아둔 그대는 누구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밥 한 그릇 올리고자 하는 그대는 누구인가.

정씨가 최근 발표한 시 ‘하늘의 그물’이 떠오른다. 올해 정지용문학상을 받은 작품이다.

‘하늘의 그물은 성글지만/ 아무도 빠져나가지 못합니다/ 다만 가을밤에 보름달 뜨면/ 어린 새끼들을 데리고 기러기들만/ 하나 둘 떼지어 빠져나갑니다’

이 시의 첫 구절은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天網恢恢 疎而不失(천망회회 소이부실)’이다. 하늘의 법은 넓고 높아 엉성한듯 보여도 인간의 죄는 결코 그 그물을 빠져나가지 못한다. 노자의 이 구절을 그대로 이어 시로 쓴 정씨는 그러나 어린 새끼들을 데리고 가는 기러기는 그 그물을 빠져나간다고 말한다. 굳이 따지고 분석하지 않아도 죄와 연민, 슬픔과 사랑의 정조가 마치 한 폭의 동양화를 보는듯 직정(直情)적으로 와닿는 시다. 근래 우리 시가 독자들로부터 외면당하는 이유가 이런 서정의 상실에 있다고 보는 이들이 많다. 정씨는 등단 이후 30여년 동안 이런 직정의 서정시를 자신의 시의 길로 지켜온 우리 시단의 흔치 않은 시인이다.

부석사 인근에는 국내 최초(1542년)의 서원이라고 우리가 일찍부터 교과서에서 배운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있다.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이라고도 하는 이곳의 마당가에 핀 애기붓꽃, 섬초롱꽃을 보며 메모지를 꺼내들던 정씨는 “꽃이 아름다운 이유는 뭘까요?”라고 말했다. “사람을 위안해주기 때문일 겁니다. 나는 시가 사람을 위안해주는 역할이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돈(물질)과 사랑(마음) 때문에 고통을 받습니다. 사랑 때문에 당하는 고통의 편린을 치유할 수 있다면 저 자신에게는 ‘시가 된다는 것’ 자체가 큰 위안입니다”라고 그는 덧붙였다.

정씨의 모습은 그의 시편처럼 지천명의 나이를 넘긴 이 답지 않게 단아하다. 그러나 이런 그의 모습과 시편 뒤에는 ‘칼날’이 숨어있다. ‘칼날 위를 맨발로 걷기 위해서는/ 스스로 칼날이 되는 길뿐’이며 ‘희망 없이도 열심히 살아갈 수 있는 희망이 생겼’다는 의식을 통과해서야 그의 시학이 이루어진다.

서울로 돌아가는 길에 죽령으로 접어들자 희방폭포가 나타난다. 그는 희방폭포에서 다시 그대를 향한 묵언정진을 말했었다. ‘이대로 당신 앞에 서서 죽으리/ 당신의 사리(舍利)로 밥을 해 먹고/ 당신의 눈물로 술을 마신 뒤/ 희방사 앞마당에 수국으로 피었다가/ 꽃잎이 질 때까지 묵언정진하고 나서/ 이대로 서서 죽어 바다로 가리’(‘희방폭포’ 전문).

● 연보

▲1950년 경남 하동 출생·경희대 국문과 졸업

▲1972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동시 부문 당선 등단

▲시집 ‘슬픔이 기쁨에게’ ‘서울의 예수’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 등

▲소월시문학상(1989) 동서문학상(1997) 정지용문학상(2000) 수상

● 정호승 시의 문학성과 대중성

시집 ‘사랑하다가 죽어버려라’는 정씨의 시 세계에서 커다란 전환을 이룬시집이다. 1972년 등단한 후 소외된 인생들에 대한 연민에 시대의 고민을 담아왔던 그의 시세계는, 이 시집을 기점으로 보다 본질적인 존재론적 고민으로 심화한다. 정씨는 “내게 죽을 때 들고 갈 단 한 권의 시집을 꼽으라면 바로 이 시집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씨가 7년 만에 낸 이 시집은 그런데 전혀 뜻하지 않게도 베스트셀러가 됐다. “단 한 사람만이라도 이 시집을 통해 나처럼 위무받는 사람이 있다면 좋겠다”던 시집이 순식간에 10만부 가까이 팔려나간 것이다.

이 시집 이후 그는 시집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라’를 연이어 발표한다. 그리고 이른바 대중성 시비에 잠시 휘말리기도 한다. 시집들 제목을 봐도 그렇지만 그의 시에는 늘 사랑, 외로움, 슬픔, 그리움이라는 단어들이 그대로 노출된다. 값싼 감성을 자극하는 싸구려 시들과 별 차이가 없어보인다. 그러나 도식화된 감성으로 누선을 자극하는 대중시들, 요즘 베스트셀러를 점령하고 있는 수많은 대중시들과 그의 시는 다르다.

한 평자는 그 차이를 감정의 유형이 아니라 ‘정서의 맥락’이 문제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정씨는 “시인이 감정을 자꾸 숨길 필요도 없다. 그러나 사랑을 이야기하면 유치하고, 대중적이고, 상업적이라는 비판은 수긍할 수 없다. 시의 대중성의 기준은 현실의 고통을 통과했느냐 하는 것이다. 시인은 ‘시의 방법’으로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고품한 문학성을 저버려서는 안된다. 상업성이란 것도 문학성이라는 커다란 테두리 안에서 나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문학성과 대중성의 행복한 조화를 누리는 드문 시인이 바로 정호승이다.

부석사=하종오기자

joha@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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