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전반에 서서히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우면서 국제통화기금(IMF) 사태가 터진 ‘97년의 악몽’이 재연될지 모른다는 우려감이 높아지고 있다.겉으로 드러나는 거시경제지표들의 호조에도 불구하고 경상수지 악화 및 구조조정 지연에 따른 금융시장 불안, 정치권력의 행정장악력 약화, 민간부문의 도덕적 해이현상 확산 등 정치·경제·사회분위기가 ‘97년 신드롬’을 재연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97년의 축소판’과도 같은 현재의 경제상황이 완전한 ‘97년의 복제판’으로 가는 것을 막으려면 경상수지 악화와 구조개혁 지연이라는 두 암세포를 바로 지금 도려내야 한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자칫 ‘제2의 경제위기’를 자초할 수 있기 때문이다.
▦97년에도 지표는 괜찮았다
97년 성장률은 5.0%. 그러나 환란(換亂) 전인 1-3분기 성장률은 6.1%로 경기하강기치고는 비교적 괜찮은 편이었다. 4.5%의 소비자물가상승률도 당시로선 ‘안정’으로 평가됐다.
올해 예상성장률은 8-9%, 물가상승률은 2.5% 등 97년보다 훨씬 좋다. 사상 유례없는 ‘고성장-저물가-저금리’다. 그러나 지표만으론 위기가 오는지, 가는지 분간키 어렵다는 사실은 이미 97년 경험을 통해 입증된 바 있다.
▦대외균형에 틈새가 생긴다
97년 환란의 근본원인은 경상수지 적자누적. 94-97년 4년간 무려 440억달러가 넘는 경상수지 적자로 연평균 110억달러의 국부(國富)가 새나갔고 안정적 달러확보 수단이 없어지다보니 이는 나라빚의 순증(97년 9월말 총외채 1,805억달러)으로 나타났다.
지금이 ‘97년의 축소판’으로 우려되는 부분은 바로 경상수지 악화. 폭발적 수입증가와 국제 고유가행진을 감안하면 120억달러 흑자목표달성은커녕 적자반전도 배제할 수 없다.
경제의 대외적 건강지수이자 유일한 환란방지장치인 대외균형(경상수지 안정)이 서서히 깨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97년의 3배가 넘는 850억달러의 외환보유액이 있지만, 총외채가 1,400억달러가 넘는 상황에서 외환보유액이 결코 ‘환란예방약’은 될 수 없다.
▦종금과 투신
97년 금융불안의 핵은 종금사. 한보그룹 부도 이후 종금사 부실채권이 늘어나면서 ‘무차별 여신회수→기업 연쇄도산→금융부실 증가→은행권 신용경색→금융시장 붕괴’로 일파만파 번져나갔다.
현재의 금융시장 불안의 진원지는 투자신탁. 대우사태로 곪아터진 투신부실 문제는 공적자금 투입으로 일단락됐지만 시장불안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고 있다.
97년 종금사 위기로 도매금융시장이 경색됐다면 투신사 문제는 자본시장 경색을 야기해 주가·금리불안 및 기업자금 조달난을 낳고 있으며 대규모 부동(浮動)자금을 양산함으로써 금융권 자금흐름을 경색시키고 있다.
▦기아와 대우, 추진력 붕괴
97년 최대실패작은 기아자동차 처리지연. 정부와 채권단은 기아차 경영진과 노조에 질질 끌려다니며 100일(부도유예협약회부-법정관리신청발표)을 허송세월했다.
대우차 처리도 작년 7월 이후 10개월째 답보상태다. 채권은행 관계자는 “97년 기아차 처리가 경영진과 노조의 ‘국민기업론’에 발목이 잡혀 지연됐다면 지금은 ‘국부유출론’을 앞세운 해외매각반대운동이 대우차 처리를 가로막고 있다”고 말했다.
기아차 처리 지연은 전적으로 정권말 레임덕에 원인이 있었다. 지금은 비록 임기중반으로 정권의 리더십이 살아있지만 정치권의 여소야대 구조 하에서 개혁추진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분위기며 관료들의 눈치보기와 사회전반의 도덕적 해이 현상도 갈수록 도를 더해가고 있다.
이성철기자
sc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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