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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부치 타계/자민 6.25총선 '동정표'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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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부치 타계/자민 6.25총선 '동정표'노려

입력
2000.05.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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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전총리의 타계는 6월 총선에 커다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자민당은 오부치 전총리의 63회 생일인 6월25일로 예정된 총선을 그에 대한‘추도행사’로 자리매김, 최대한 동정표를 끌어 모을 태세다.

반면 야당은 오부치 전총리가 뇌경색으로 쓰러진 직후 아오키 미키오(靑木幹雄)관방장관이 총리대리를 맡고 이어 모리 요시로(森喜朗)총리 내각이 탄생한 일련의 과정에 의혹이 있다며 ‘오부치 효과’를 희석시킬 방침이다.

자민당은 오부치 전총리가 연립정권 운영과 홋카이도(北海道) 우스(有珠)화산 분화 대책에 쫓기다가 쓰러졌다는 점에서 국민들의 폭넓은 연민을 사고 있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내각·자민당 공동장 형식이 검토되고 있는 장례식을 선거전과 겹쳐 치르는 등 ‘오부치 효과’확산에 매달릴 것으로 보인다.

‘오부치정권의 계승’을 내걸고 취임한 모리총리로서는 또 7월 오키나와(沖繩) 주요 8개국(G8) 정상회담의 성공을 선거 쟁점의 내세울 전망이다. 오부치전총리가 개최를 결정하고도 의장역을 하지 못한 금세기 최후의 G8 정상회담은 ‘오부치 효과’를 살리는데 더할 나위 없는 재료이다.

자민당에는 비슷한 역사가 있다. 1980년 6월 중·참의원 동시 선거전 도중 당시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총리가 협심증으로 급서했다. 동정표가 몰린 결과 중·참의원에서 모두 단독 과반수를 넘는 압승을 거두었다.

오부치 전총리 재직 시절 G8정상회담 이후가 대세였던 총선 일정이 6월로 앞당겨진 것도 동정표가 식기 전에 해치우기 위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모리총리는 오부치 전총리 사망 직전인 이날 오전 NHK 대담에서 총선 날짜가 6월25일로 굳어가는 움직임에 대해 “그런 흐름을 바꾸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사실상 투표일을 확정했다.

오부치 전총리의 사망 시점은 마치 사전 연출이 있었던 듯 절묘하기 짝이 없다.

이에대해 야당은 모리정권 탄생 과정에 의문을 제기, 정통성에 흠집을 내고 ‘오부치 계승’ 의미를 희석하기 위한 정치공세를 본격화할 것으로 보인다.

총리 임시대리 취임 당시 아오키장관은 오부치 전총리가 의식불명에 빠지기 직전 “만일의 경우 뒷일을 부탁한다”고 밝힌 것을 근거로 내세웠다. 그러나 병원관계자들은 당시 이미 오부치전총리가 의미있는 의사표시가 불가능한 상태라고 증언했다.

이에따라 민주당은 15일 오부치내각 총사퇴의 무효확인을 청구하는 행정소송을 낼 방침이다. 국회에서 진상해명을 요구하는 것은 물론이고 선거전에서도 정권 탄생의 불투명성을 물고 늘어질 움직임이다.

/도쿄=황영식특파원

■[오부치는 어떤인물] 일경제 최악위기서 살려

서민적 풍모로 인기

14일 타개한 오부치 게이조(小淵惠三) 전 일본 총리는 늘 겸허한 자세로 남의 의견을 들어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會根康弘)전 총리로부터‘진공 총리’라는 말을 재임시 들어왔다.

1998년 7월 참의원 선거 참패의 책임을 지고 퇴진한 하시모토 류타로(橋本龍太) 전총리에 이어 일본 총리에 취임한 그는 정권 출범 당시 그는 ‘식은 피자’ ‘범인(凡人)’ 등 싸늘한 눈길을 받았다.

그러나 ‘경제 재생 내각’이라는 총리로 취임할 당시의 약속대로 전후 최악의 위기에서 일본 경제를 되살려 내고 자유·공명당과의 연립을 통해 수년간 밀려온 법안을 일사천리로 처리하는 등 의외의 추진력을 보였다.

또 각계 각층의 인사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의견을 듣는 ‘부치폰’이 상징하는 서민적 풍모로 한동안 인기가 급등하기도 했다.

총리 취임 직전까지 외무장관을 맡았던 그는 특히 외교면에서 많은 업적을 남겨 21세기 일본 외교의 초석을 놓았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의 잦은 만남을 통해 한일 관계를 미래지향형으로 끌어올렸고 미일 안보협력지침(가이드라인) 관련법을 제정, 대미 동맹관계를 확고히 했다. 중국·러시아와의 우호관계를 강화한 것은 물론 대북 수교교섭에 나서 전체적으로 동북아 정세의 안정에 기여했다.

그러나 지난해 10월 자자공(自自公) 연립 정권 발족이후 그는 3당 사이의 정책 조정에 애를 먹었으며, ‘수(數)의 횡포’에 대한 여론의 반작용으로 지지율이 급격히 하락했다.

4월2일 쓰러지기 몇시간 전까지도 그는 자유당의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당수, 공명당의 간자키 다케노리(神崎武法) 대표와 3당 당수 회담을 열고 자유당의 연정 이탈을 최종 결정했다.

당시 홋카이도(北海道) 우스(有珠) 화산의 분화 대책 지휘에 따른 육체적 피로가 극심했던 상태에서 자유당의 연정 이탈에 따른 정국 운용 고민이 결국 그의 죽음으로 내몰았다.

1937년 군마(群馬) 현에서 태어난 그는 와세다(早稻田) 대학을 거쳐 1963년 26세의 최연소 기록으로 중의원에 당선된 이래 12회 연속 당선됐다. 나카소네 야스히로·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전 총리의 틈바구니에 끼여서도 꼭 3등 당선을 이뤄낸 저력으로 ‘계곡의 백합’으로 불리기도 했다.

일찍이 다케시다 노보루(竹下登) 전 총리의 두터운 신임속에 ‘다케시타파’를 묵묵히 관리해 왔으며 1992년에는 파벌을 승계, ‘오부치파’를 이끌어왔다.

자민당의 적통을 이어온 강한 자존심에도 불구하고 좀체 이를 드러내지 않았다. 유족으로 부인 시즈코(千鶴子·59) 여사와 1남 2녀가 있다.

도쿄=황영식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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