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초 서울 구산중 정인관(鄭寅寬·57)교감은 교무실에서 뜻밖의 반가운 전화 한통을 받았다. 20년전 명지고 재직시절의 제자로, 지금은 한국문단의 어엿한 중견시인으로 성장한 박상철(朴商喆·35)씨로부터였다. “선생님, 요즘도 서오릉에 가시죠. 이번 주말에 그곳에서 선생님을 뵙고 싶습니다.”경기 고양시 서오릉은 정교감이 국어교사로 서울 명지중학교에 처음 부임한 1971년 까까머리 학생들을 데리고 백일장에 참가하기위해 찾아갔던 곳. 이후 30년간 거르지않고 매년 꿈많은 ‘문학소년’들의 손을 잡고 찾는 곳이다.
정교감은 명지중·고 자양고 당산중 증산중 등 부임하는 학교들마다 문예반을 만들어 학생들에게 독서와 글짓기 지도에 힘을 쏟았다. ‘한글을 빛내자’는 뜻의 ‘글빛’은 정교감이 거쳐간 학교마다 문예반의 이름이 됐다. 그래서 학교는 다르지만‘글빛’이란 이름의 문집은 20권째 이어져왔다.
‘물레야 물레야’란 시로 94년 윤동주 문학상을 받기도 한 정교감은 학생들에게 시험성적보다 ‘감성의 텃밭’인 글쓰기의 중요성을 늘 강조해왔다.
이렇게 ‘글빛’ 안에서 정교감의 가르침을 받으며 ‘글빛’을 통해 꿈을 키워 온 제자들이 시인과 소설가, 반듯한 사회인 등으로 자라 이제 은사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달하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토요일인 13일 오후 3시. 서오릉 입구에서 30년 추억을 되짚어보고 있던 정교감의 품으로 마흔이 다 되어가는 문인 제자에서부터 몇해전 가르침을 받았던 대학생까지 30여명의 제자들이 하나둘 찾아들었다.
“선생님, 많이 늙으셨어요.” “선생님, 요즘도 문예반 지도를 하시나요.”출신 학교도, 나이들도 저마다 달랐지만 한 선생님 밑에서 ‘글빛’ 이름을 함께 사용했던 제자들은 금세 동창이 됐다. 시인 김미자(金美子·38·여)씨는 “선생님은 끊임없이 읽고 쓸 것을 주문하면서 문학소녀의 감성을 일궈주셨다”고 회상했다.
“갑자기 지방에 갈 일이 생겨 못가게 됐습니다. 선생님 고맙습니다.” 자리에 함께 못한 제자들의 아쉬움도 쉼없이 정교감의 핸드폰을 울렸다.
“재능을 가진 학생들이 입시에 찌들어 피어보지 못하는게 안타까웠습니다. ‘글빛’이란 이름으로 이들에게 토양을 마련해 준 것 뿐인데 이렇게들 고마워하니….”
학창시절 서로가 썼던 시와 독후감들을 새삼 돌려보며 웃음꽃을 피운 사제(師弟)는 앞으로 ‘전국글빛모임’을 만들어 동인활동을 펴자고 즉석에서 의견을 모았다. “선생님이 정년 퇴임하실 때에는 ‘글빛’출신들의 글을 모은 기념 문집을 선생님께 상재(上梓)하겠습니다.”
이동훈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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