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정원'을 읽고소설가 황석영(57)씨가 13년 만에 발표한 장편소설 ‘오래된 정원’이 출간 20여일 만에 8만부가 팔려나가며 단숨에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른바 본격소설이 단기간에 이렇게 일반 독자의 호응을 받은 것은 근래 드문 일. 문단과 출판계에서는 황씨 개인뿐 아니라 최근 침체해있던 우리 문학에도 호재라며 반기고 있다. 문학평론가 황종연(40)씨가 본보에 기고한 ‘오래된 정원’의 서평을 게재한다.
황석영의 신작 ‘오래된 정원’의 서사를 움직이는 것은 한마디로 말해서 망각과의 싸움이다. 십팔년의 형기를 마치고 석방된 공안수 오현우가 사랑의 추억이 남아 있는 산골 ‘갈뫼’를 찾아가 여러 날을 묵으면서 그의 애인 한윤희가 남긴 생전의 기록을 읽으며 ‘세속의 길로 돌아오는’ 과정은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진 80년대, 그 투쟁의 체험을 소생시키는 회상의 경로를 이룬다. 그 회상은 오월 광주항쟁에서 베를린 장벽 붕괴에 이르는 주요 역사적 사건을 불려들일뿐만 아니라 어린 시절 어머니가 만들어준 김밥의 맛과 같은 내밀한 느낌까지 되살려낸다. ‘기억나세요’라는 말은 한윤희가 오현우에게 주는 사랑의 헌사이자 황석영이 이천년대의 독자들에게 전하는 각성의 명령이다.
망각에 대한 저항은 사실 서사라는 예술 형식의 정신적 근원이다. 모든 뮤즈의 어머니는 기억(Mnemosyne)이라고 현명한 그리스인들은 진작에 일러주지 않았던가. 기억의 서사는 변화의 운명에서 비롯되는 상실과 절멸의 고통으로부터 인간을 구원하고 역사적 경험 속에 비장된 어떤 인간 정체성의 보증을 찾아낸다. 이러한 서사적 구원은 ‘오래된 정원’에서도 뚜렷이 작용한다. 지나간 사랑, 정열, 신념의 흔적을 떠올리면서 오현우는 세상과 단절된 ‘외로움’으로부터 벗어나고, 변화하는 세상 속에 있을지 모를 그의 존재를 위한 거처를 찾아나간다. ‘감옥’에서 ‘집’으로라는 궤적을 그리는 그 정신적 행로는 그의 자아가 ‘희망’이라는 불굴의 보편적인 인간 원리 속에 있다는 확인을 수반한다.
오현우에게 나타난 ‘새로운 출발’의 가능성은 그 나름의 역사철학을 배후에 거느리고 있다. 인간의 모든 역사적 행동의 원동력은 ‘오래된 정원’으로 상징되는 유토피아에 대한 동경이라는 것, 좌절로 끝날 수밖에 없는 그러한 동경은 인간 역사에 끊임없는 반복을 낳는다는 것이다. 이 유토피아 의식은, ‘갈뫼’에서의 사랑과 같은 장면에서 보다시피, 낭만적 반자본주의를 기조로 하고 어머니의 대지적 사랑을 지고한 가치로 내세운다. 오현우의 삶을 의미있게 하는 역사철학은 ‘어머니는 논리가 아니다’ 같은 작중 발언에 따르건대 역사의 이성에 대한 믿음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에도 그것은 세상이 어떻게 달라지든 오현우와 같은 혁명의 전사들을 비극적이면서도 장엄한 역사적 주체로 남아 있게 해준다.
‘오래된 정원’에 담긴 기억의 서사는 경청할 가치가 충분하다. 지난 십년간 한국소설이 현대성을 구가하는 망각의 축제에 빠진 혐의가 있음을 생각하면 특히 그렇다. 하지만 오현우라는 낭만적 자아의 회고적 재건이 과연 지금도 유효한 정체성의 정치학인지는 의문이다. 사라진 목가적 삶의 이상화의 혁명적 에너지의 원천이었을뿐만 아니라 파시즘이든 인민주의든 대중의 욕망을 통제하고 관리하는 이데올로기의 레퍼토리가 아니었던가. 사회주의 체제 붕괴 이후의 역사적 변화는 단지 희망에 대한 배반의 과정이 아니라 자아를 규율하는 기성 감각과 사유 형식에 대한 재고의 과정이다. ‘오래된 정원’에 그러한 재고의 시도가 전혀 없다고 말한다면 너무 인색한 판정이겠지만, 그것은 왕년의 혁명 전사를 위한 위안에 비하면 미약하다. 오현우는 외로움의 감옥으로부터 나오긴 했어도 아직 ‘세속’으로 돌아오진 못한 게 아닐까.
황종연 문학평론가 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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