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약자도 처형…통제안된 국가폭력, '민족불행'한국전쟁 참화와 관련, 민간인 집단학살은 가장 아픈 상처로 각인되어 있다. 그동안 이제까지 공산주의자들이 자행한 양민학살은 무수히 이야기돼 왔으나, 그외의 학살사건들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함구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한국전쟁을 전후해 자행된 민간인 집단학살은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뿐만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경찰과 군인 및 우익단체들에 의해서도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한국전쟁 개전 전·후의 집단학살
신생 이승만 정부는 대구 10·1사건(1946년), 제주도 4·3항쟁(1948-1949년), 여·순반란사건(1948년)의 연장선에서 좌익제거 및 남로당 게릴라 섬멸작전의 일환으로 1949년말부터 1950년초 사이에 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했다.
주로 남한의 산간마을에서 주민들을 학살하고는 공비들의 소행으로 호도하는 수법을 쓰기도 했다. 1949년 12월 24일 경북 문경군 산북면 석봉리에서 70∼100명의 국군이 자행한 양민학살이 그 대표적인 예일 것이다. 피학살자 86명 가운데에는 60세 이상의 노인이 13명, 1∼3세의 유아 11명을 포함한 12세 이하의 어린이 22명도 포함돼 있었다.
이런 유의 학살은 도시지역에서도 자행되었다. 1961년 3월 21일에 대구 상인동에서 발굴된 학생유해나, 같은 해 3월 26일에 대구지구 피학살자 유족회가 송현동 대덕산에서 발굴한 500여구의 유해는 1949년 12월경부터 1950년 2월말경 사이에 학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들 중에는 16세 소녀와 60여세의 노파도 있었다.
대전 서구 둔산지구, 당시 간이비행장터에서도 여·순반란사건에 관련된 학생들로 추정되는 많은 청년들이 군인들에 의해 희생되었다.
한국전이 발발하여 전황이 다급하게 전개되자, 이승만정부는 수감돼있던 정치범들과 북한군에 협력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민간인들을 조직적으로 처형했다. ‘대전형무소 처형사건’과 ‘국민보도연맹원 학살사건’은 그 대표적인 예다.
한국전이 발발하자 군과 경찰은 대전형무소 재소자 1,800여명을 대전 동구 낭월동(당시 충남 대덕군 산내면 낭월리 골령골) 등지에서 불법적으로 처형했다. 이같은 처형은 북한 인민군이 한국 경찰 및 군인가족과 우익인사 1,300여명을 대전형무소 우물에 수장시키는 보복살육을 낳았다.
이승만 정부는 1949년 6월5일 ‘국민보도연맹’을 결성했다. 남로당 및 좌익정당으로부터 탈당·전향한 사람들에게 ‘대한민국에 멸사봉공할 길을 열어 줄 포섭기관’으로 결성된 것이다. 그러나 가입회원들의 소속단체들은 좌익단체들 뿐만이 아니라 한독당과 같은 우익단체도 있었다. 즉 이승만 정권에 반대할 수 있는 단체들은 총망라된 셈이다.
그런데 조직이 전국적으로 확대되면서 경우에 따라서는 본인뿐만 아니라 주위 사람들도 강제로 가입시키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 조직의 발안자인 오제도는 맹원 수가 30만명 이상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한국전까지 50만명 정도는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 정부는 조국에 멸사봉공하기로 맹세한 이들을 단기간에 조직적으로 처형했다. 1950년 7-8월 사이에 수원 이남지역 전역에서 자행된 이 학살은 그 규모와 진행과정으로 보아 이승만대통령과 조병옥내무장관의 명령에 따라 이뤄진 것으로 판단된다.
1950년 7-8월에 대구와 그 인근지역인 가창, 월배(송현동), 본리동, 성서, 칠곡 신동고개, 경산시 평산2동 코발트광산 등지에서도 대규모 학살이 자행되었다. 그리고 경북 성주군에서도 1950년 음력 9월 17일 밤에 선남면 소재 강변에서 48명이 살해된 것을 비롯하여 벽진면의 달창골, 초진면의 너리골, 월항면의 가랑미골 등 8개 장소에서 약 600명이 학살되었다.
4·19 직후 대구·경북유족회가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한국전 개전을 전후해 대구·경북지역에서만 3만명이 학살되었고, 그들 중에서 실제로 좌익활동을 한 사람은 5분의 1도 안 되었다고 한다. 제주도 섯알오름 타약고 터에서 1950년 8월 20일에 자행된 학살도 이런 맥락에서 이뤄진 것이다.
학살이 자행되는 과정에서 또 다른 형태의 인권유린이 동반되었다. 1950년 8월 대구형무소에 수감돼있던 미결수 300명을 진주형무소로 이감시킨다며 데려가 삼천포 앞바다에서 수장시켰다. 그런데 호송헌병들은 이들을 살해하기 전에 남녀를 묶어두고 잔혹행위를 자행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런 유의 만행은 같은 시기에 해군 주둔군 및 첩보대(G2), 헌병대, 전투경찰대, 해상방위대 등 8개의 관민 단체들이 통영에서 저질렀던 800여명의 수장 및 부녀자 농락에 비하면 그리 놀라운 일이 못된다.
이와 같은 살육이 과연 필요했는가? 한국의 경찰, 군인, 우익단체들에 의해 자행된 이와 같은 살육은 공산군의 점령하에서 피난 못간 군인·경찰 가족 및 우익인사들에 대한 보복살육을 낳은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그간 한국정부는 ‘남로당원들의 봉기가능성을 막기 위해서’라고 이와 같은 살육들을 정당화시켜 왔다. 그러나 그들이 모두 남로당원도 아니었을 뿐더러 그들도 대한민국 국민이었고, 비무장 민간인들이었다는 점에서 민족의 불행이 아닐 수 없다.
◆국가폭력의 사적유용
이승만 정부는 부산을 임시수도로 결정하면서 지역 내의 불안요소를 제거한다는 미명하에 1950년 7월부터 9월 사이 1만여명을 살해했다.
개전 초에 부산형무소에는 기결수와 미결수 6,000여명이 있었는데, 모두 학살됐다. 이들에 대한 학살은 형무소 내에서 이루어졌고, 그 시체들은 영도 골짜기 등 인근 산악지대에 버려졌다.
또한 당시 경남 김해군 대동면 신어산 골짜기의 폐광산에서도 많은 민간인들이 살해·암장돼 그 유골들은 현재까지 발견되고 있다. 그리고 이 시기에 특무대가 검거한 많은 민간인들을 부산 앞바다에서 산채로 수장시키기도 했다. 그 뿐만 아니라 이승만정권은 자신들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하지 않은 지식인, 언론인들에 대한 탄압방법으로 대량검거 및 집단살해를 했으며, 심지어 1951년 가을에는 영도의 벽돌공장에 노숙하고 있던 500여명의 피난민들을 집단 살해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개전 후에 있은 수많은 양민학살들 중에서 가장 가공할 예는, 경남김해군 진영읍에서 자행된 ‘국가폭력의 사적유용’에 의한 학살일 것이다. 이 지역은 공산군의 점령도 없었던 곳이다. 그러나 당시 진영지역에서는 기관장과 유지들의 독단과 사설조직에 의해 많은 주민들이 사상과 무관하게 학살당했다. 4·19 혁명후 진영 주민들에 의해 발굴된 시신만 335구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와 같은 양민학살은 그 양태에 다소간의 차이가 있으나 전국 각지에서 자행되었다. 그런데 전쟁이 진행되면서 소위 ‘공비’의 근거지 주변마을들에서 주민 소개(疏開)의 명목으로, 혹은 전과(戰果)를 올리기 위해 저절러진 주민학살은 학살극의 절정을 이루었다. 불갑산에 접해 있던 전남 함평에서는 국군 11사단 20연대 2대대 5중대에 의해 524명(월야면 350명, 해보면 128명, 나산면 46명)의 민간인이 이같은 명목으로 학살됐다. 또 경남 산청, 함양, 거창에서는 국군 11사단 9연대가 인민군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견벽청야작전을 실시하며 1951년 2월 8일부터 2월 11일 사이에 1,500여명의 주민들을 집단 살해했다.
수복지구에서 한국의 경찰 군대 우익단체들이 주민들을 ‘공산군에 협력했다’는 명목으로 살육한 것은 어찌 보면 그리 놀라운 일이 못될 것이다.
자국 정부가 자국민을 살육하는 상황에서 미군이 노근리를 포함하여 전북 익산역, 경남 사천, 경남 마산, 경북 구미, 경남 함안, 경남 의령, 경남 창령, 충북 단양, 경북 예천 등지에서 양민들을 학살할 때 누가 막을 수 있었겠는가?
1960년에 전국 피학살자유족회 노현섭회장이 정부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가족들에 의해 한국전을 전후해 학살된 것으로 신고된 사람은 113만명이다. 이 자료는 경남 25만명, 경북 21만명, 전남 21만명, 전북 19만명, 제주 8만명, 경기 6만명, 충북 5만명, 충남 3만명, 강원 3만명, 서울 2만명이 각각 희생된 것으로 밝히고 있다.
◆잘못된 역사도 역사다.
이와 같은 대규모의 민간인 학살은 통제되지 않은 국가폭력이 어떤 만행을 저지를 수 있는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잘못된 역사도 역사다. 이를 숨기려 하는 것은 역사에 대한 기만이다. 지난날의 잘못된 역사에서 반성과 교훈을 얻지 못하는 민족은 희망이 없는 민족이라는 사실은 인류역사의 보편적 진리이다. 한국에서 한국전후 최근까지 자행된 국가폭력의 남용은 지난 날의 잘못된 역사를 제대로 규명하지 않은 소치다.
과거 정부들은 정통성이 부족하여 국가폭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민주화된 현 정치상황에서는 잘못된 역사에 대한 진상규명과 그 잘못을 인정·보상하는 조치들이 충분히 취해져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야 일제가 우리에게 저지른 만행에 대해서 규탄할 수 있는 정당성이 확보될 수 있을 것이다.
*다음은 22일(월)자에 ‘북진과 북한점령’
허만호(경북대 정치외교학과교수)
mhheo@k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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