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뷔40년 앵콜공연앞둔 이미자이미자가 은퇴를 한다는 말을 듣고 깜짝 놀랐다.
이미자는 무대에서 죽을 줄 알았다. 아니 우리 모두가 그런 가수를 보고 싶어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래야만 ‘국민가수’가 아니겠는가. 그래서 만난 이미자는 은퇴는 커녕 더 큰 꿈을 꾸고 있었다. 소박한, 그러나 멋진 꿈이다. 벽지와 낙도를 돌며 한 푼 안받고 노래를 부르고 싶어 했다.
화환이 아니면 어떠랴. 들꽃도 좋다. 데뷔 40년 기념 서울 앙코르공연을 앞둔 이미자는 내년이 예순이다.
"은퇴 보도는 의미가 잘못 전달된것"
_은퇴를 한다는 기사가 며칠 전 어느 신문에 실렸다. 사실인지.
“아니다. 와전된 것이다. 얼마 전 그 기사를 쓴 기자가 찾아왔을 때 이 달 22일과 23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리는 ‘데뷔 40년 기념 앵콜 공연’이 대규모공연으로는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라고 말했는데 그걸 가지고 은퇴한다고 보도했다. 한 마디 더 한다면 가수란 팬들이 더 이상 찾지 않는 때가 은퇴할 때다. 나는 ‘은퇴’라는 단어를 싫어한다는 말도 해야겠다.”
_대규모공연 말고 다른 방법으로 팬들과 만나겠다는 말인데 구체적으로 무슨 계획이 있는 건가.
“1979년부터 5년마다 대규모 공연을 해왔다. 89년에는 데뷔 30주년 기념공연, 작년에는 데뷔 40주년 기념공연 하는 식으로 해온 것인데 데뷔 45주년이 되는 해는 내가 예순 넷이 된다. 그 나이에 준비에만 1년 이상 걸리는 큰 공연은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 무리다. 하게 된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래서 지금 일정이 잡혀있는 공연이 다 끝나는 내년부터는 그동안 내가 직접 찾아가지 못한 읍 면이나 낙도를 찾아가서 노래를 하려 한다. 이런 지역 팬들은 가끔 TV로나 찾아갈 수 있었지, 한 번도 무대에서 노래하는 모습을 보여드리지 못했다. 어쩌면 그 분들이 나를 더 좋아할지도 모르는데….”
_그것도 힘이 많이 들텐데, 돈도 들 것이고?
“돈이 더 문제겠지. 나는 그 분들을 위해 무료로 노래를 할 생각이지만 반주 악단이나 함께 출연할 분들에게는 적게라도 출연료를 드려야 하기 때문에 그 문제만 해결되면 곧 바로 준비에 들어갈 것이다. 그런 지역은 무대가 없기 때문에 학교운동장에서 노래를 불러야할 것이다. 그러면 또 어떤가. 그런 대로 낭만과 멋이 있을 것 같다. 데뷔 직후 60년대 초, 혁명정부가 인기 연예인들을 6개 ‘소대’로 나눠 전국을 순회시켰을 때도 그런 식으로 공연했는데 당시는 힘들었지만 지금은 추억이 되고 있다. 가수와 연기자가 탄 트럭이 앞서고 소도구와 무대장치를 실은 트럭이 뒤따르면서 전국을 돌았는데 그 때 흑산도에서도 노래를 부른 기억이 난다. 한국일보가 그 공연을 후원하는 건 어떤가. 2년이나 3년이면 순회가 끝날텐데?”
_체력적으로 큰 공연은 더 못한다는 건 연습을 많이 해야 하기 때문인가.
“아니다. 프로그램을 짜기 위해 신경을 많이 써야하는데 그걸 견디기 힘들다는 말이다. 여태껏 공연을 해오면서 내가 주로 프로그램을 짜고 연출자는 그걸 다듬어왔다. 오프닝은 어떻게 하느냐, 막을 내릴 때는 어떤 모습을 갖추느냐, 중간에는 또 어떤 변화를 주느냐는 등 큰 줄기는 내가 정했다. 이번 40주년 기념공연을 위해서는 우리가요를 보존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우리가요 초창기인 1930년대에 나왔다가 없어진 노래들을 복원하는 작업도 해야했다. 또 40년을 정리하고, 내가 살아오고 노래를 해온 것을 팬들에게 보고한다는 의미에서 책도 한 권 써야했는데 정말 힘들었다. 한 2년은 준비한 것 같다. 다시는 그렇게 힘들게 일을 할 수 없을 같다.”
_무대에서는 힘이 안 든다는 말인가.
“무대에서도 힘든 건 사실이다. 요즘은 립싱크가 유행이라지만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직접 노래를 해서인지 힘이 많이 든다. 또 내 노래는 높낮이도 심하고 굴곡이 많아 뱃속에서 소리를 뽑아내야 하니까 그런 노래와는 다르다. 하여튼 무대에서도 체력이 작년과 올해가 또 다르다. 어떨 때는 정말 힘들어 죽겠다는 생각도 났다.
"공연없으면 가정에 충실... 장도 직접봐요"
_공연이 없을 때는 어떻게 보내나. 시장에도 직접 간다는데….
“가정에 충실하려 한다. 무엇이든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고 있다. 직접 장을 보는게 화제가 되나. 장은 보지만 재래시장에는 자주 못 간다. 백화점이나 마켓에 주로 가는데 팬들이 미소를 보내주면 나도 웃음으로 대답하고 그런다.”(그는 몇해전 TV연예프로그램에 나갔다가 ‘요즘 콩나물 값이 얼마냐, 쌀 한 말이 얼마인지 아느냐’는 사회자의 질문에 정확히 대답, 방청석에서 큰 박수를 받은 적이 있다.)
_가수 생활 40년에 돈은 얼마나 벌었나.
“나는 돈이란 ‘남한테 빌리러 가지 않을 정도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한다. 돈이 없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요즘 가수들과 비교하면 많이 벌지 못했다. 요즘 가수들은 성공하면 음반 판매량이 천문학적인데다 인세로 수입을 올린다. 저작권도 보호를 받고…. 우리가 노래를 할 때는 그런 게 없었다. 레코드 회사에 전속으로 있었기 때문에 월급을 받았지 인세라는 건 생각도 못했다. 레코드가 100만장이 팔려도 회사수입이지 내 것은 아니었다. 많이 팔리면 레코드 회사 사장이 고생했다고 용돈을 주거나 옷해입으라고 돈주는 게 보너스였다. 그때는 봉투도 없고 수표도 없을 때여서 신문지에 돈 뭉치를 둘둘 말아 받아온 것도 기억이 난다. 그렇다고 요즘 젊은 가수들을 부러워한다는 건 아니다.”
-책을 썼다고 했는데 많이 팔렸는가.
“작년 데뷔 40주년 기념공연에 맞춰 ‘인생- 여자 40년, 노래 40년’이라는 책을 냈다. 상업적인 목적으로 낸 게 아니고 아까 말한대로 팬들에게 나를 보고한다는 의미에서 낸 책이다. 공연장에서 주로 팔고 서점에도 일부 냈는데 그렇게 많이 나가지는 않았다. 책은 내가 구술하면 누가 도와줘서 쓰는 방식으로 만들었다.”
"일본선 연예인사망 대서특필 된다는데..."
_프랑스에서 이브 몽땅이 죽었을 때 권위지를 포함, 모든 신문이 1면에 그의 부음기사를 실었다. 당신이 죽으면 어느 정도 대접을 받을까.
“프랑스까지 갈 것 없다. 일본만 해도 미소라(美空) 히바리가 죽었을 때 모든 방송이 정규방송을 중단했으며 전국에 빈소가 마련됐다. 거의 국장이라고 할 만했다. 모든 면이 우리와 비슷하다는 일본인데도 대중연예인에 대한 사회적 시각은 다른 것 같다. 나도 그런 대접을 받을 수 있을까, 그런 바램도 없진 않은데 과연 그렇게 될까. 한국일보가 1면에 써주면 되겠지.”(이어서 그는 몇해전 한국일보가 ‘한국을 움직인 100인’을 선정한 이야기를 했다. 가요인으로는 그 혼자만 뽑혔는데 이게 일본에 소문이 나 일본사람들은 그가 한국에서 히바리 이상의 가수라고 생각하는 걸 여러 차례 느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 지식인들이나 지성인들은 그가 1989년 데뷔 30주년 기념공연을 세종문화회관에서 하겠다고 나서자 반대하고 나섰다며 요즘은 많이 달라졌지만 정말 씻을 수 없는 기억이라고 했다.)
_오늘날의 국민가수 이미자가 있기까지 누가 가장 큰 영향을 끼쳤나.
“동백아가씨를 작곡한 백영호씨와 박춘석씨다. 특히 박선생님은 당시에도 우리나라 대중문화 수준을 뛰어넘는 인텔리였다. 곡도 많이 써주셨고 반주도 많이 하셨다. 무대매너도 가르쳐주셨다. 어떤 점에서는 박선생님이 우리나라 대중예술 수준을 높였다고도 할 수 있다. 요즘은 작곡가와 가수의 관계가 그런 정도는 아닌 것 같다. 어쩌면 기계적으로 레코딩을 해서인지 인간미는 점점 얇아지는 것 같다.”
■ "내 노래는 전통가요… 일본노래와 달라"
그는 자신을 트롯트가수라고 부르지 말아달라고 했다.
“일본도 엔까(演歌)라는 단어 하나로 자기네의 노래와 다른 노래를 구분하고 있는데 왜 우리는 엄연한 우리 노래에 외국 이름을 붙이느냐”고 했다.
그는 마땅한 이름이 없어 자신은 자신의 노래를 ‘전통가요’라고 지칭한다며 좋은 이름이 하루 빨리 지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애가(哀歌)’라고 하자는 말도 있었지만 그것도 미흡하다고 했다.
그는 또 자신의 노래가 한 때 왜색풍이라고 비난받은데 대해 일본노래와는 분명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일본노래는 목에서 간들거리는, 굴리는 소리가 특징인데 우리 전통가요는, 뭐랄까 한국적 한이 서려있는 것이 다르다.
그런 점에서 나는 내가 가장 한국적 가수라고 자부한다. 그런 내 노래를 왜색조라며 방송금지를 했으니…."
그는 ‘한(恨)’이란 단어를 자주 사용했다. 언더그라운드 가수들이 전통가요를 리메이크해서 부른 것을 몇 번 들어보았는데 전통가요의 기본 요소인 ‘한’을 제대로 풀어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물론 곡 자체를 요즘 분위기에 맞게, 시대적 변화에 맞춰 새롭게 해석한 탓도 있지만 그들은 ‘한’을 모르기 때문에 그런 맛을 낼 수 없는 게 더 큰 이유라고 말했다. 하지만 젊은 가수들이 옛 노래를 다시 부르는 건 어쨌든 좋은 일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또 이런 걸로 봐도 아무리 힙합이니 랩이니 외국풍 노래가 유행해도 전통가요는 계속 살아남을 것이라고 단정했다.
“소위 댄스뮤직이라는 걸 좋아했던 사람들도 서른 안팎이 되면 어머니나 아버지가 좋아했던 전통가요를 좋아하게 된다는 이야기 많이 듣는다. 이건 아이들이 스파게티, 피자를 좋아하지만 밥과 김치 없이는 못사는 것과 같은 이치다.
전통이라는 게 그리 쉽게 없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또 그렇게 남아야 하는 게 당연하고. 그렇다고 내가 그런 노래를 배척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과 이미자로 이어지는 한국 전통가요 여가수의 계보를 이을 가수를 누구라고 보느냐는 마지막 질문에 “곤란한 질문이다. 내 후계가 누구라는 말을 어떻게 하느냐, 그런 가수가 있다는 것도 말할 수 없다”고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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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자 연표
1941 서울 한남동 출생
1959 ‘열아홉 순정’으로 데뷔
1964 ‘동백아가씨’발표
1965 ‘동백아가씨’ ‘기러기 아빠’ ‘섬마을 선생님’방송금지
1969 1,000곡 발표 돌파 기념 공연
1987 ‘동백아가씨’등 해금
1989 대중가수로는 최초로 세종문화회관 공연(데뷔 30주년 기념)
1995 대중가수로는 김정구 손목인 반야월 황금심에 이어 5번째로 화관문화훈장
1999 데뷔 40주년 기념 전국순회공연 시작
가족:김창수씨(전 KBS 방송위원)와 1남2녀
정숭호 편집국 부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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