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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 임은주·안향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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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 임은주·안향미

입력
2000.05.1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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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역사' 일구는 개척자들●임은주● 1966년 서울서 태어났다. 초·중·고를 거치며 육상, 배구, 필드하키를 했고 청주사대 때도 필드하키 선수로 활약했다. 1990년 베이징(北京)아시안게임 여자축구대표로 발탁됐다. 93년 이화여대 축구팀 감독을 거쳐 97년 국내 최초의 여자 국제심판, 99년 국내 최초의 여자 프로심판이 됐다.

●안향미● 1981년 경남 합천서 태어났다. 92년 서울 영동초등학교 5학년때 야구를 시작해 경원중, 덕수정보산업고에서 1루수와 투수로 활약했다.

올 2월 고교 졸업후 소속팀 없이 혼자 운동했으나 최근 미국 워터베리다이아몬즈팀이 스카우트 의사를 표명, 미국에서 제2의 야구인생을 시작하게 됐다.

이들은 늘 관심과 호기심의 대상이었다. 남자 세계에 뛰어든 최초이자 유일한 여자들이었기 때문이다. 국내 최초의 여자 축구국제심판 겸 여자 프로심판 임은주씨와 국내 최초의 여자 야구선수 안향미씨. 안향미씨가 미국서 활동하게 됐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 만난 이들은 이제 희소성 대신 실력과 노력하는 자세로 평가받겠다고 약속했다.

_ 안향미 선수는 미국에 진출한다면서요.

안향미 = 박찬호 선수를 메이저리거로 만든 재미 스포츠에이전트 스티브 김이 얼마전 전화를 했습니다. 워터베리다이아몬즈팀이 저를 스카우트하겠다고 했답니다. 미국에 가봐야 정확한 사정을 알겠지만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입단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비자가 나오면 곧바로 미국으로 건너갈 계획입니다.

임은주 = 정말 잘 됐네요. 가서 꼭 성공하길 바랍니다.

안향미 = 기대도 되고 걱정도 됩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야구 인생이 끝나는 줄 알았는데 새로운 기회가 마련됐으니 가슴 설렙니다. 하지만 미국 여자 야구는 저변이 넓은데다 선수들의 신체조건이나 힘이 저보다 훨씬 좋기때문에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이 많이 됩니다. 하지만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임은주 = 그래요. 자신감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 같아요. 자신감만 있으면 스스로도 모르는 잠재능력을 찾아낼 수 있고 실력도 배가할 수 있어요.

안향미 = 저는 야구를 하면서 늘 ‘국내 유일’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말을 듣는 사람이 한 명 더 있어 평소 만나고 싶었습니다. 바로 언니였어요. 축구와는 어떻게 인연을 맺었는지 궁금해요.

임은주 = 어려서부터 덩치가 컸고 운동을 잘했어요. 축구는 91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을 앞두고 여자대표팀을 보강할 때 합류하면서 인연을 맺었습니다. 달리기를 잘하는데다 고등학교와 대학때 했던 필드하키는 전술 등이 축구와 같기 때문에 선발됐지요. 1년만에 국가대표팀을 그만 두었습니다. 국가대표와 직장 일(한국사회체육센터 체육지도자)을 병행하다보니 직장 일에 소홀하게됐던데다 대학원 진학 준비에도 지장이 많았기 때문이죠. 92년 이화여대 체육교육대학원에 입학해 선수 겸 코치로 뛰다 1년후 감독을 맡았어요. 감독이 되고보니 규칙을 잘 알아야겠더라고요. 협회에 문의를 자주 했습니다. 그랬더니 심판할 생각 없느냐고 묻더군요. 하고 싶다고 했죠. 심판은 그렇게해서 됐어요. 97년에는 국제심판 자격증을 땄고 99년에는 프로축구 전임 심판이 됐습니다. 둘 다 여자로는 국내 최초였죠.

안향미 = 저는 초등학교 5학년때부터 야구를 했습니다. 한살 아래 남동생이 리틀야구를 했는데 한번은 집으로 돌아오다 길을 잃어버렸어요. 그래서 부모님이 저를 딸려보냈는데 그러다 야구에 빠졌어요. 남동생은 반년만에 그만두었는데 저는 지금까지 계속하고 있습니다.

_ 하지만 여자들이 하지 않는 일을 하면서 어려움이 있었을 것 같은데요.

임은주 = 늘 검증의 대상이었어요. 큰 경기를 맡겨놓고선 미리 연습경기에 내보내면서 테스트를 했어요. 과연 큰 경기를 잘 소화할 수 있을까 믿지 못했기 때문이죠. 여자라는 이유때문에 더 많은 검증을 받는 게 사실 유쾌한 일은 아니거든요. 하지만 무난히 잘 해냈고 그래서 지금은 그런 일 없답니다.

안향미 = 진학문제가 힘들었어요. 중학교도 특기생으로 받아주지 않아 일반 학생으로 입학한 뒤 야구부가 있는 학교로 전학했고 고등학교는 저때문에 체육특기자 자격이 바뀌는 등 우여곡절 끝에 진학할 수 있었어요. 당시 여학생의 특기 종목에 야구가 빠져있었는데 제가 문제가 되자 교육청이 규정을 바꿔 야구를 여학생 특기 종목에 포함시켰습니다. 여자가 무슨 야구냐, 그 정도 공 스피드로 제대로 할 수 있느냐는 비아냥도 적지 않았습니다.

_ 체력이나 기량은 어땠습니까.

임은주 = 제가 남자 심판보다 나이가 10살 가량 적고 달리기도 잘 하기 때문에 체력은 오히려 앞섭니다. 저 100㎙ 13초에 뛰어요. 축구 주심이 한 경기에서 뛰는 거리가 13㎞나 된데요. 경기를 마치면 몸무게가 3∼5㎏정도 줄 정도로 힘이 드는데 큰 무리없이 소화하고 있습니다. 경기를 매끄럽게 진행하는 게 가장 큰 역할인데 지금까지는 무난했다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안향미 = 어려움이 많았아요. 중학교, 고등학교로 올라갈수록 남자 선수들과 힘에서 차이가 났기 때문이죠. 연습을 따라가기도 힘들었어요. 제가 1루수를 보다가 고교 2학년때 투수로 전향한 것도 그런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공을 던지고 받고, 치고 막는 연습할 때 짝이 있어야하는데 힘이 달려 남자 선수들과 같이 하기 어려웠어요. 그렇지만 투수는 목표물을 세워놓고 던지면 되니 짝없이도 할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커브 슬라이더 등 변화구도 던지지만

가장 기본인 직구는 스피드가 110㎞ 밖에 안나왔어요.

_ 하지만 여자이기 때문에 이익이 되는 것도 있지 않습니까.

임은주 = 저는 심판인데도 스타 선수들한테나 있는 팬클럽과 후원회가 있습니다. 아마 여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습니다. 언론을 통해 제 활동이 많이 알려지는 것도 기분 좋은 일이지요.

안향미 = 저도 많은 도움을 받았습니다. 특히 진학을 둘러싸고 문제가 생기면 많은 분들이 도와주었어요. 남자 선수였다면 그랬을까 싶어요. 팬도 많았어요. 경기가 있는 날이면 ‘안향미 출전시켜라’하는 관중이 적지 않았어요. 야구를 계속했던 건 제게 관심을 보여주고 제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발벗고 나선 바로 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들을 생각하면 아무리 힘들어도 그만 둘 수가 없었어요. 연습 도중 힘에 겨워 숨을 헉헉대면서도 이들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참고 참고 또 참았습니다.

_ 여자들의 활동 영역이 확대되고 있기 때문에 비슷한 길을 걸을 후배들이 있을 겁니다.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해주고 싶습니까.

임은주 = 축구 발전을 위해서는 여자 심판, 여자 지도자가 많이 나와야 합니다. 북한만 해도 여자 국제심판이 5명, 중국은 8명입니다. 축구 선진국은 말할 것도 없고요. 제가 잘 해야 후배들이 더 쉽게 심판을 할 것이라는 생각을 잊은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남자심판을 적대적으로 생각한 적도 없어요. 같은 동료로서 선의의 경쟁을 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안향미 =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받아주는 팀이 없었습니다. 프로팀 테스트에서도 떨어졌고요. 문화관광부에 야구를 계속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탄원서도 냈습니다. 속이 많이 상했었는데 지금은 조그만 희망 같은 것이 샘솟고 있습니다. 내가 잘해야 우리 여자 야구가 발전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겼기 때문이죠. 우리나라에도 10년안에 여자팀이 생길 것으로 생각합니다. 야구를 좋아하지만 여건이 갖춰지지 않아 선수가 되지 못한 여학생들이 있는데 그때쯤이면 팀이 구성돼 신나게 야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합니다.

_ 가장 기억에 남는 경기는 무엇입니까.

임은주 = 작년 7월 미국서 열린 제3회 여자월드컵 브라질과 노르웨이의 3, 4위전 주심을 보았을 땝니다. 원래는 참가 심판중 가장 어린 제가 결승전을 맡기로 돼있었답니다. 하지만 미국이 결승전 상대로 중국이 올라오자 같은 아시아인이라며 저를 기피한 바람에 3, 4위전에 나가게 됐다 합니다. 경기가 끝난 뒤 제프 블래터 국제축구연맹(FIFA) 회장이 저를 불러 “한편의 드라마를 본 것 같다”고 칭찬해 으쓱했지요.

안향미 = 배명고와 붙은 지난해 대통령배고교야구 준결승전요. 공식경기로는 유일한 출전이었어요. 선발로 나갔는데 그만 첫 타자에게 몸에 맞는 볼을 던지고 말았어요. 한 타자만 상대하고 내려왔습니다. 결과가 신통치 않은데다 주어진 기회를 못살렸으니 속이 매우 상했습니다. 97년 10월 대구상고와의 연습경기도 기억에 남아요. 처음 마운드에 올랐거든요. 타자 3명을 모두 범타 처리했습니다. 지켜보던 사람들이 웃었는데 왜 웃는지는 물어보지 못했어요.

_ 앞으로의 계획이나 포부는 무엇입니까.

임은주 = 올 여름 시드니올림픽 축구의 심판으로는 확정됐습니다. 올림픽을 무사히 끝낸 뒤 일본이나 스페인, 영국 리그로 진출하고 싶어요. 그리고 서울서 열리는 2002년 월드컵 개막전에서 심판을 보는 것도 소망입니다.

안향미 = 저는 일단 미국에서 제가 가진 기량을 최대한 발휘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미국 선수들의 기량이 워낙 좋다보니 결과가 나쁠 수도 있을 겁니다. 해도 해도 안되면 야구 심판이나 지도자 공부라도 하렵니다.

진행·정리 = 박광희기자khpark@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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