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재건 최고회의시절서 68년까지5·16 군사쿠데타(61년) 이후 박정희(朴正熙)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시절과 63년 12월 5대 대통령 취임 이후 68년까지의 통치사료가 최근 발견됐다.
청와대 통치사료비서관실은 최근 도서관 자료정리 과정에서 당시 8년 동안 국가재건최고회의와 대통령 비서실이 작성한 국정일지 15권중 14권을 찾아냈다. 67년분 1권은 누락됐다. 청와대는 이달중 정부기록보존소로 일지를 이관, 영구보존할 계획이다.
이 일지는 검은색 하드커버 겉장에 ‘日誌’라고 한자로 적혀 있으며 A3 용지 크기의 종이에 가로로 주요 내용들이 펜글씨로 기록돼 있다.
최고회의 시절의 일지는 3개월 단위로 편철돼 모두 10권이며 행사 외교 의결사항 인사 인사왕래 중요발표 중요지시 중요업무 보고사항 재판 상훈 국내외뉴스로 구성돼있다.
3공화국 출범 이후부터는 1년 단위로 편철됐으며 주요행사 주요정무 주요지시 주요발표 인사 인사왕래 주요뉴스 참고사항 순으로 기록돼있다.
일요일이나 공휴일에는 기록이 없었으며 ‘김신조 간첩단 청와대 피습사건’이 있었던 68년 1월21일 등 청와대 내부가 혼돈을 겪었던 시기에도 일지는 빠져 있다.
일지에는 사건 개요만이 기록돼 그동안의 ‘역사’를 교정해야할 새로운 사실은 없었으나 통치주체의 입장에서 기록한 ‘1차 사료’라는 점에서 의미있는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당시 관보나 신문에 나오지 않는 박의장의 관심사나 동정이 세밀하게 기록돼 있어 격동기 역사의 보완자료로도 가치가 있다. 특히 최고회의 시절의 일지에 대해 정은성(鄭恩成)통치사료비서관은 “당시 쿠데타 세력의 상황인식을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라고 말했다.
눈에 띄는 내용중 61년 7월3일 인사항목은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소장 선출, 내각 수반 송요찬(宋堯讚) 임명…(중략)…최고위원 장도영(張都暎) 등 4명 사임, 40명 장성 예비역으로 편입’으로 기록, 당시 박의장이 전권을 장악했음을 밝히고 있다.
61년 9월4일 중요업무란에는 ‘특정외래품 판매금지법 운용에 대해 커피 원두는 법에 따라 판매할 수 있으나 다방에서 커피를 팔게 되면 혁명분위기를 깨뜨리는 결과가 재래됨으로 업자에게 권고, 역수출되도록 결의’라는 내용이 적혀있다.
당시 경직된 사회상을 잘 보여주고 있다.
또 62년 3월22일 국내외 뉴스란에는 ‘윤보선대통령 하야. 상오11시30분 하야성명 발표. 사표수리여부 최고회의에서 토의키로 결정’이라고 적혀있다.
62년 10월22일에는 ‘김종필중앙정보부장은 22일 일본 수상관저에서 이케다(池田)수상과 회합한 후 하오9시반 향미’라고 비교적 상세히 주요인사의 동정이 기록돼 있다.
특히 김종필(金鍾泌)당시 공화당의장이 당내분에 책임지고 사퇴한 63년 1월24일에는 국내외뉴스란에 ‘의외의 혼선에 책임을 느껴 김종필씨 당직사퇴 표명. 공화당 분규에 박정희의장 수습책 6개항 지시’라고 돼있다.
그 밑에는 ‘동경올림픽 단일팀 구성협상 개시, 선수 유니폼 문제는 합의됐으나 국기사용에는 미합의’로 적혀 있어 당시 남북협상의 편린을 보여주고 있다.
이어 2월25일 김종필씨의 자의반 타의반 외유 때에는 뉴스란에 ‘1. 김종필씨 박의장의 특명전권대사로 외유. 버마 土耳基(터어키) 구주 등 歷訪(50일 예정) 2. 김종필씨 외유에 앞서 회견에서 의혹사건에 관련있다면 달게 심판받겠다고 언명’이라는 동정만 두개가 기록돼 있다.
그만큼 당시 JP의 정치적 비중은 컸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박정희의장이 윤보선전대통령과 운명의 일전을 벌인 5대 대통령선거(63년 10월15일) 다음날에는 ‘박정희후보 당선 결정적’이라고 적혀있어 당시 개표가 지금처럼 빨리 진행되지 않았음을 보여주었다.
한일회담 반대데모가 한창이던 64년 6월3일 중요정무란에는 ‘국가안전보장회의, 20시 비상계엄 선포. 사령관에 민기식대장 임명(방종, 참을대로 참다 사회질서 회복위해 단안)’이라고 적혀있고 참고사항란에는 ‘학생데모대 국회의사당 앞서 연좌, 파출소 3곳 탈취’등 긴박한 당시 상황이 기록돼 있다.
이영성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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