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생활수기 최우수작] 가슴으로 치른 産苦나는 자식 넷을 가슴앓이의 산고를 치르고 얻은 어미다. 슬하에 4남매를 거느리고 있는 나는 남부럽지않은 복많은 어미다. 현재 군 복무 중인 착하고 충직한 육군병장인 아들, 태권도가 2단인 대학 3년생 큰 딸, 꿈 많은 여고생인 새침떼기 셋째. 그리고 셋째와는 15살 터울인 막동이 석규.
이들 4남매는 천하를 준다 해도 바꿀 수 없는 내 소중한 보물들이다.
석규는 아직 우유 냄새 폴폴 풍기는 사내아이다. 나이 쉰의 문턱에 들어선 여자가 까마득한 늦동이를 등에 업고 길을 나서면 어느새 나이를 잊게 된다. 뒤늦게 얻은 자식이니 만큼 남부럽지않게 길러 사회의 걸출한 일원으로 진출시킬 때까지 난 최선을 다하는 어미가 될 작정이다.
석규 몫으로 마련한 10년짜리 교육적금. 낙출없이 적금을 치르기 위해선 살림 틈틈이 부업을 해야 할 것 같다. 가사와 부업으로 바쁘다보면 잔 병 치 쯤은 잊고 살 것이고, 아이의 교육자금도 불어날 것이니 일석이조가 아닌가.
기분이 내키면 양 팔을 나비처럼 추켜올리고 방실 방실 웃는 아이. 세상 모르고 방실거리는 석규의 천진한 얼굴을 바라 볼 때면 눈물이 핑 돈다.
체중이 9㎏, 신장이 67㎝인 석규. 첫 돌이 지난 아이치곤 자그마한 편이다. 부실한 외양과는 달리 감성지수만은 꽤 발달된 듯 싶다. 지금 난 부업으로 기성복센터의 옷 실밥을 뜯어내면서 녀석의 감성지수를 테스트해 본다.
“석규야”하고 나지막히 불렀더니 옆에 앉아 장난감을 달그락거리며 정신없이 놀던 아이가 금새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용케 어미가 부르는 걸 의식하곤 입 가에 방긋방긋 웃음을 짓는 것이다. 새벽이슬 묻은 갓 피어난 꽃송이 같이 싱그러운 어린 것의 웃는 얼굴을 보면서 내 마음은 덩달아 즐거워진다.
황량한 세상 길을 헤쳐가면서 어쩌면 석규와 난 눈길 한 번 마주치지 못한 채 지나쳤을 지도 모를 사이다. 지지난 해의 일이다. IMF라는 경제한파가 느닷없이 강타했을 때였다. 당시 남편이 소속돼 있던 건축회사는 부도로 무너졌다.
건축설계사인 남편도 일자리를 잃었다. 생계에 다소나마 보태자고 손대 본 일이 바로 위탁모이다. 보수는 하루 평균 1만2,000원. 똥싸개 어린 핏덩이를 하루 24시간 보살피고 얻는 댓가치곤 턱없이 적다.
그러나 한달 36만원의 수입은 어려운 살림에 요긴하게 쓰일 수 있는 금액이 아닌가. 부업을 통해 만난 석규와 나 사이는 모자간이나 다름없는 끈끈한 사랑으로 묶이게 됐다. 석규와 내가 맺어진 근원을 따져보면 이미 옛날에 싹텄던 것인지도 모른다.
난 나이 마흔이 넘도록 독신을 고집했었다. 평범한 처녀가 결혼이란 평범한 관문을 늦도록 외면했던 것은 가난한 청소년들에 대한 애착 때문이었다. 결혼하기 전 짧지않은 시간을 전자부품 생산업체에서 인사관리를 담당했던 나는 수많은 근로청소년들과 애환을 나누게 됐다.
대부분이 고아나 다름없는 결손가정의 소년 소녀가장이나 극빈자의 자녀들인 근로청소년들. 부모사랑 속에 호강받을 나이에 고된 생활전선으로 밀려났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불우한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대부분 현실에 성실하게 적응했다.
낮엔 일하고 밤엔 야간학교에 나가는 이들은 과로와 영양결핍으로 작업장에서 쓰러지는가 하면 학비가 밀려 학업을 포기하는 아이도 있었다.
나는 번번히 월급봉투를 거덜냈다. 피골이 상접한 아이에게 고기와 영양제를 사들려 보내고, 밀린 학비문제로 학업을 중도포기하는 아이에겐 밀린 학비를 대 준 까닭이다.
냇물이 흘러 바다로 몰려가듯 나를 살붙이처럼 의지하던 아이들은 해가 바뀔 때마다 썰물처럼 내 곁을 떠났다.
좀 더 새로운 세상을 향한 발돋움이었다. 나는 문득 자기연민에 빠져들고 있었다. 직장을 나온 내가 꼭 하고 싶었던 일은 고아원이나 영아원을 운영하면서 소외된 아이들의 보모가 되어 한 평생 살고 싶은 것이었다.
꿈과 현실사이에서 방황하고 있을 때 문득 불같은 부모님의 성화가 귀에 쟁쟁했다. “시집못 간 몽달귀신이 있는 집안은 3대까지 재수 없단다” 방황하는 딸을 가정에 안주시키고자 애쓰는 부모님의 궤변임을 나 자신 모를 리 없다.
1992년 봄 나는 노처녀란 딱지를 떼내고 가정이란 둥지에 안주했다. 평소 나를 잘 알고있던 선배의 주선이었다. 43년간 버텨온 독신주의의 아집을 허문 힘은 다름아닌 엄마를 여의고 모정에 굶주린 3남매의 쓸쓸한 눈빛이었다.
나는 한 남자의 아내이기보다는 엄마 잃고 허둥거리는 3남매의 버팀목이고 싶었다. 주위에선 의론이 분분했다. 아이 셋 딸린 가난뱅이 홀아비한테 가기위해 40년넘게 고집을 부렸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난 작은 꿈을 이뤘다는 자부심까지 가질 수 있었다. 엄마잃은 3남매의 뒷바라지는 고아원을 운영하고 싶었던 내 꿈의 축소판이었기 때문이다. 꾀죄죄하니 홀아비 때에 찌든 남편은 나보다 한 살 연하의 매력이라곤 없는 남자.
그는 슬금슬금 내 눈치를 살피며 신혼여행을 가자고 했다. 3남매와 동행할 수 없는 두 사람만의 여행은 의미가 없다고 여긴 나는 신혼여행을 10년쯤 후로 미뤘다.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인 막내를 대학에 넣고난 10년 후라면 좋겠다고 했더니 남편은 겸연쩍게 웃으며 고맙다고 했다.
결혼당시 큰 아이가 중3, 둘째가 중1, 셋째가 초등학교 3학년. 3남매가 어미인 나를 진심으로 받아들이기까지 꼭 3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처음엔 ‘저기, 저…’가 이 어미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어떻게 하면 삭막하게 닫힌 3남매의 마음을 활짝 열어젖힐까.
난 자나깨나 고심을 했다. 여자로 태어났으니 잉태와 출산의 신비를 경험하고도 싶었지만 3남매를 위해 꿈을 포기했다.
환경을 바꾸기 위해 집을 옮겨도 보고, 애들의 기호를 파악해 식단을 다양하게 꾸며도 봤다. 공을 들인 식탁에서 맛이 없다고 투덜댄다거나 귀가시간을 기다려 무거운 책가방을 받고자 했는데 매정하게 뿌리칠 땐 맥이 확 풀리기도 했다.
어떡하면 이들 3남매와 허물없이 친숙해질 수 있을까. 아직도 마음 속에 세상떠난 생모에 대한 그리움을 앓고 있는 애들이나 배아픔의 고통없이 자식 셋을 얻고자 안달하는 내 처지나 갈등하기는 피차 마찬가지였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는 옛말은 헛 말이 아님을 알았다. 아이들이 드디어 어미의 진심을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녹색 베레모를 쓰고 우리 앞에 나타났던 멋쟁이가 우리 엄마가 됐다는 사실이 웬지 낯설고 불안하기도 했었어요. 통닭 바베큐와 수박을 싫어한다는 것이 사실은 우리 3남매를 더 먹이시려는 작전이었음을 뒤늦게 알고는 눈물이 났었죠.
우리 위해 잡숫고 싶은 음식 못 잡수시고 가고 싶은 곳 못 가시며 고생만 하시다가 곱던 손 거칠어지고 주름살만 쪼글쪼글해지신 엄마모습 너무너무 미안하고 죄송해요.
뿔테안경 너머의 시커먼 눈빛이 겉보기엔 무섭지만 속마음은 봄볕보다 더 따뜻한 분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엄마 너무너무 감사해요. 엄마를 사랑하는 삼남매 올림’
인연맺은 지 꼭 3년만의 어버이날에 받은 3남매의 합동편지 내용이다. 드디어 애들이 나의 진심을 받아들이고 있다는 사실이 고마워서 뜨거운 눈물이 가슴을 적셨다. 봄을 맞는 개구리떼처럼 닫혔던 3남매의 입에선 “엄마” 소리가 빗발치기 시작했다.
저녁 한 때 한 자리에 모이면 이 어미의 무릎을 서로 끌어다 베기도 하고 등에 엉겨붙기도 하고 한바탕 북새통을 이룬다. 어미품을 두고 3남매가 서로 쟁탈전을 벌이는 장면을 시집 식구들한테 여러차레 들켰다.
사람사는 집 같다며 시집식구들은 무척 신기해 했다. 어미와 같이 밤잠을 절반으로 줄이며 전력투구했던 큰애와 둘째는 무사히 대학진학의 관문도 통과했다. 대학 1학년 한 학기를 마치고 군에 자원입대한 둘째가 7주간의 훈련을 마치고 어미에게 보낸 편지 속엔 ‘엄마를 사랑해요’란 말이 열두번이나 적혀 있었다.
IMF의 먹구름이 채 가시지 않은 작년 여름 우리집엔 경사가 있었다. 석규가 우리 호적에 어엿한 막내아들로 입적된 것이다.
부업으로 위탁모를 하기 위해 D아동복지회관을 통해 처음 데려온 아이는 생후 한달 된 사생아. 이름이 영호였다. 영호는 기저귀마다 퍼런 물똥을 찔끔찔끔 묻히며 몹시 보채는 짬보였다. 3개월을 공들였더니 잘 먹고 잘 자는 원만한 우량아로 변해갔다.
정수리에 뻗힌 한 웅큼의 배냇머리가 월계관처럼 한들거리는 아이. 어르면 깔깔깔 웃고 기분이 나쁠 땐 으앙으앙 큰소리로 울어대는 자기표현이 확실한 녀석이었다. 볼품없던 핏덩이가 내 품안에서 재롱둥이로 바뀐 신기함. 나도 모르게 아이한테 홀딱 빠져버렸다.
그러나 예약된 이별이 다가오고 있었다. 해외입양 부모가 나타난 것이다. 6개월간 내 품에 안겨있던 이 어린 천사를 머나먼 이국땅 낯선 인종들한테 떠나보낸다는 사실이 몹시 안타까웠다.
무책임한 생모가 미웠고, 외국으로 등떠미는 국가와 사회의 냉대가 한심스럽게 여겨졌다. 영호에게 먹일 분유를 타다가, 기저귀를 개다가, 곤히 자는 아이얼굴을 들여다 보다가 펑펑 눈물이 쏟아졌다.
보건복지부의 통계에 의하면 매년 2,000여명이 넘는 영아들이 해외로 입양된다고 한다. 훌륭한 양부모를 만나 성공하는 사례도 있다지만 적응못하고 인종차별을 당하며 낙오자로 전락하는 예도 적지 않다는 소식이 있기 때문에 더욱 안타깝기만 했다.
세상사 알 바 없는 생후 7개월짜리 영호는 내 곁을 떠나던 그 날도 깔깔 웃고 우유를 배가 불룩할 때까지 마시다가 떠났다. 멋모르고 미국행 비행기에 실려갔을 영호 생각에 눈두덩이 퉁퉁 붓도록 울고불고 야단하는 내 꼬락서니를 남편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눈물범벅의 나날을 보내던 중 두번째로 데려온 아이가 바로 석규다. 석규는 미성년 부모사이에서 태어난 사생아. 생후 한 달 된 아이가 체중 2.9㎏이었으니 건강상태가 미숙아 정도였다.
좀 야비한 얘기지만 첨엔 석규를 등한시했다. 정이 들면 이별이 너무 어렵다는 이유였다. 일당 1만2,000원짜리 일거리로만 여기고자 애를 썼다. 말 못하는 어린애도 세상일을 다 안다더니, 아이는 정말 내가 품고 있는 속마음을 꿰뚫은 듯했다.
처음부터 내 관심을 독점하는 것이다. 방안 공기가 조금만 건조해도 금새 감기가 들어 열이 오르고 하루에 열두번도 더 먹은 것을 토해냈다. 밤과 낮이 바뀌어 애를 먹이기도 했다. 백일이 지나면서 아이는 조금씩 살이 오르고 밤낮이 정상으로 돌아갔다.
개구리 다리처럼 꼬이던 볼기짝엔 토실하게 살이 붙었고, 불그러졌던 배꼽도 오목하게 들어갔다. 목욕물에 따뜻이 몸을 담그면 아이는 두 손을 웅크려 쥐고는 사뭇 바둥거린다.
그 모습이 어찌나 앙징스러운지 나도 모르게 물묻은 고사리 손에 뽀뽀를 하고 만다.
어느새 난 영호한테 못다한 사랑을 석규에게 쏟아붓고 있었던 것이다. 또 한차례 겪을 이별의 아픔에 눈 앞이 캄캄해졌다. 애써 아이와의 정을 떼 볼 양으로 마음을 다그쳐봐도 모두 허사였다.
석규와의 생이별의 날이 임박하자 난 조바심이 났다. 절실한 마음을 남편에게 말했더니 마이동풍이다. 3남매 뒷바라지도 버거운 판에 양자가 무슨 소용있느냐며 나를 비정상적인 사람으로 여겼다.
그 강팍한 마음을 녹이려고 발 아래 엎드려 눈물로 애원했다. 식음을 전페하고 애걸했다. 남편은 거듭 여의치못한 가정사정을 내세우며 내 마음을 달랬다.
난 석규의 양육비와 교육비만은 내 힘으로 마련하겠노라고 각서까지 썼다. 간절한 내 소원은 마침내 이루어졌다. 철옹벽 같은 남편의 마음이 마침내 움직인 것이다.
입양을 책임지고 있는 D복지관측에선 우리집의 경제사정을 들어 입양을 꺼렸다. 그러나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꿀수 있었던 것은 다름아닌 사랑이란 커다란 힘이었다. 석규는 마침내 우리집 호적에 막내아들로 버젓이 입적이 되었다.
난 이제 4남매의 어미가 된 것이다. 지난 2월엔 석규의 첫 돌잔치를 조촐하게 벌였다. 그 날 가슴뭉클했던 것은 새 손자의 첫 돌을 축하하기 위해 시부모님께서 300리 먼 길을 달려오셨다는 사실이다.
시부모님께선 당신 아들 품에 안겨있는 새 손자의 손가락에 돌반지를 끼워주셨다. 고집스런 며느리를 배려하시는 시부모님의 깊고 크신 사랑 앞에 난 뼈 속까지 저리는 감격의 눈물을 한 없이 쏟았다.
새로 얻은 막내동생의 생일을 축하하고자 휴가를 받아 달려온 큰 아들, 용돈을 아껴 예쁜 장난감을 사들고 온 두 딸. 형과 누나들에 둘러싸인 석규의 모습이 한결 든든해 보였다.
셋째를 대학에 넣고 가려고 했던 우리부부의 신혼여행은 이제 한참 더 뒷전으로 미루어야 할 것 같다. 막둥이 석규를 대학에 입학시킨 17년쯤 뒤라야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때 우리 내외는 고희의 언덕에 오를 것이고 신혼여행이 아닌 황혼여행이 될 것이다. 17년 뒤의 황혼여행 땐 사랑스런 네 자식들의 웃음꽃 속에 호강 한 번 흐믓하게 누려 볼 참이다.
/김홍순(52·서울 동작구 사당1동)
■[생활수기 최우수작 인터뷰] 김홍순
“사람들이 혈연에 집착하는게 너무 안타까워요. 기른 정도 이렇게 깊은데”
올해 여성생활수기 최우수작 수상자로 뽑힌 김홍순(52·서울 동작구 사당1동)씨는 지난 해 연말 호적에 올린 막내아들 석규를 안고 인터뷰를 위해 신문사를 찾았다.
“애가 까다로워 다른 사람한테 맡길 수가 없어요.” 함께 온 남편 류명균(51·건축업)씨는 “아이가 예쁘다고 한 시도 떼어놓지 못한다”고 핀잔을 주었다.
그의 수기‘가슴으로 치른 산고(産苦)’는 전 처의 3남매와 입양아를 기르면서 느낀 감회와 모성을 그린 글. 배앓이를 해 낳은 자식은 아니지만 그에게는 기르는 정이 지극하다. 마흔을 넘긴 1991년 홀아비인 남편을 만나 결혼할 때도 엄마를 잃은 3남매의 쓸쓸한 눈빛 때문에 마음을 굳혔다. 젊었을 때는 고아원이나 영아원을 운영하는 것이 소원이었다는 김씨는 “자신이 낳지 않았다고 외면하고 제 자식만 싸고 도는 세태가 못마땅해 이 글을 쓰게 됐다”고 말했다.
“한 밤에 기저귀를 갈기 위해 깨어나 아이의 얼굴을 들여보고 있노라면 다시 잠이 오지 않았다. 석규처럼 해외로 입양가는 많은 아기들이 되도록 국내에 입양될 수 있도록, 입양을 망설이는 다른 부부에게 힘을 주고 싶었다.”
아이를 입양했다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얘기하면 ‘아이의 장래에 나쁜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하는게 보통 입양부모들의 마음이다. 그는 “숨긴다고 숨겨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성장한 후에 사실을 알고 충격을 받기 보다 아예 털어놓고 키우는게 낫다”고 말했다.
그의 가족에게는 핏줄을 따져 사랑하는 것 자체가 터무니 없다. 형과 두 누나는 막내의 고집이나 재롱이 꼭 자기들을 닮았다며 “정말 류씨 피야”라고 한 목소리다. 처음엔 달가워하지 않던 남편도 목욕시키기, 손톱발톱 깎이기 등을 도맡아 할 정도로 정을 쏟아붓는다. 위의 3남매에게 사랑을 가르치는 기회도 됐다. 이들은 “엄마에게 받은 사랑을 동생에게 갚는다”고 말한다.
지난 연말에는 아이의 생모를 찾기 위해 수소문하기도 했다. “입양서류에는 생모가 결손가정 출신으로 가출, 미혼모가 된 미성년자라고 돼 있었다. 아이가 자립할 수 있도록 우리가 도와줄 작정이었지만 끝내 나타나지 않았다”며 안타까워 했다.
집안이 넉넉한 것은 아니다. 처음에 경제사정을 들어 입양을 반대하던 남편에게 ‘아이의 학비는 내가 벌겠다’고 각서를 썼을 정도다. IMF로 남편이 한동안 실직하고 생활이 어려워지면서 그는 지금도 남의 아이를 맡아 키우는 일을 하고 있다. 친엄마가 집을 나간 뒤 아이의 할머니가 양육비를 주면서 맡긴 4개월된 아기다. “이 아이도 내가 입양하면 좋겠지만 아이의 장래를 위해 친 엄마가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김동선기자dongsun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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