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일은 어린이날, 8일은 어버이날, 그리고 내일은 석가탄신일이다. 5월은 산다는 것에 대해 많은 걸 생각하게 하는 달이다. 우리는 왜 태어난 것일까. 무엇 때문에 사는 것일까. 침팬지를 비롯한 많은 다른 동물들도 그들 나름대로 무언가를 생각하며 산다.무엇을 먹을 것인가, 어디에 숨을 것인가 등은 물론 누구와 손을 잡아야 권력을 쥘 수 있는가까지 생각하며 살아간다. 하지만 삶의 의미 그 자체에 대해 생각하며 살아가는 동물이 우리 인간 외에 또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산다는 것은 정말 무엇인가. 시인 박목월은 그저 “왜 사냐건 웃지요”라고 했다. 어린이용 사전에서 ‘생명’이란 단어를 찾아보면 대개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의 기간”이라고 정의돼 있다. 어른들을 위한 사전에는 상당히 많은 정의와 설명들이 있지만 아이들에게는 시간적인 정의를 주었다. 무엇보다 시작과 끝이 있다는 이른바 한계성이 생명의 특성 중 아마 가장 뚜렷한 것인가 보다.
불교에서는 우리 삶을 생로병사라 일컫는다. 제 아무리 천하를 호령하던 진시황도 불로초를 찾아 헤매다 결국 한 줌의 흙으로 되돌아 갔다. 생명은 또 윤회한다는 것이 불교의 가르침이다. 기독교인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언젠가는 죽는 것이지만 원죄를 뉘우치고 예수님을 영접하면 영생을 얻는다고 믿는다. 이처럼 종교는 우리에게 생명의 한계성을 극복하여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보여준다.
박테리아는 대개 이분법이라는 방식으로 번식한다. 하나의 박테리아가 둘로 갈라져 새로운 박테리아를 생성한다. 그런데 어떤 박테리아는 때로 접합이라는 과정을 통해 회춘을 꾀하기도 한다. 두 마리의 박테리아가 접합관이라는 통로를 연결하여 서로 유전물질을 맞바꿔 삶의 새 출발을 기도하는 것이다. 고린도후서 제4장 16절 말대로 “겉사람은 낡아가나 속사람은 새로워질 수 있는 것”이다. 이론적으로는 이러한 방법으로 영원히 죽지 않고 살고 있는 박테리아가 있을 수 있다.
이처럼 삶을 개체의 수준에서 바라보면 누구나 한계성 생명을 지니지만 유전자의 눈으로 다시 보면 영속적인 것이다. 나는 비록 죽어 사라지더라도 내 유전자는 자식의 몸을 통해 영원히 살아남을 수 있다. 우리는 살아 숨쉬고 움직이는 우리들, 즉 생명체들이 생명의 주체라고 생각하지만 영원히 살아남는 것은 유전자뿐이다.
그래서 하버드대의 생물학자 윌슨(E. O. Wilson)은 “닭은 달걀이 더 많은 달걀을 얻기 위해 잠시 만들어낸 매체에 불과하다”고 했다. ‘이기적인 유전자’의 저자 도킨스(Richard Dawkins)에 따르면 유전자야말로 태초부터 지금까지 존재해 왔고 앞으로도 살아남을 ‘불멸의 나선’이고 생명체란 그저 유전자들의 복제계획을 달성하기 위해 잠시 만들어진 ‘생존기계’에 지나지 않는다.
태초의 바다 속에서 어느 날 우연히 자신을 복제할 줄 아는 화학물질로 태어난 DNA는 몇 십억 년 동안 온갖 모습의 몸을 만들며 지금도 면면히 그 생명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최재천 서울대 생명과학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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