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 발목까지/ 발밑까지 눕는다/ 바람보다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김수영의 ‘풀’ 전문)깡마른 얼굴, 누가 봐도 지식인 냄새가 나는 시인 김수영은 1968년 봄 ‘풀’을 말했다. 김수영의 ‘풀’이 바람 거친 들판, 풀과 자연과 권력만이 존재하는 순수의 공간에서의 풀이었다면, 혹은 그것이 사람 사는 곳에서의 힘과 계급을 은유했다면 유용주의 ‘풀’은 개천가의 풀이다.
유용주는 김수영 시인이 시를 쓸 때 전북 장수에서 살던 열 살 소년이었다. 염색공장 오폐수나 양계장 닭똥물이 섞여 몸 무거운 여편네처럼 어기적거리며 흐르는 물줄기, 그 물줄기가 비누 거품을 걷어내고 그 거품 위로는 비닐 봉지며, 콜라캔 따위가 올라타 있는 그런 시궁창 같은 개천가에 난 풀이다.
‘저 미친 년놈들/ 또 꽃을 피우고 마는구나/ 무더기로 무더기로/ 다시 살아나는구나…간도 쓸개도 사타구니까지 다 빼앗긴 것들이/ 목구녕이 포도청이라고/ 죽어 정승보다 살아 짐승이 더 좋다고’(‘풀’ 중)
김수영과 유용주, 둘 다 풀을 이야기했지만 그들의 ‘풀’은 뿌리가 다르다. 김수영은 서울서 살았고, 유용주는 서산에 산다. ‘전원’의 느낌으로 따지면야 서울의 풀이 어찌 서산의 그것을 따라갈까마는 사실 꼭 그렇지도 않다.
이제 시골은 없다. 전국 중소 도시 어느 곳을 가보라. 방 방 방이다. 노래방, 게임방, 그리고 스물 내외의 반바지와 끈나시(민소매) 유니폼을 입은 ‘티켓걸’들이 ‘항시 대기’ 중인 다방, 시를 이루는 개체는 동(洞)이 아니라 방(房)이다.
‘비디오 상영/ 광진다방 484_2983/ 그 속에는 온갖 모양으로 구부러진/ 담배꽁초 성냥알 찢어진 메모 쪽지/ 씹다 버린 껌이 들어있다’(‘재떨이’중) 그 다방에는 하루 제 일당이 커피값 몇 잔밖에 되지 않는 허름한 인생들이 프림과 설탕을 탄 채 제공되는 커피를 마시며 청춘을 보낸다. 그것이 바로 중소도시의 삶이듯, 중소도시의 중소인생들은 제 인생 만큼이나 허름한 풀들을 피워낸다. 그 안에서도 별로 내세울 것 없는 시인은 제 못난 푸념을 풀에 들이댄다. 도시의 개천이 복개돼 밑으로 밑으로 썩고 있다면, 중소도시의 개천은 드러내 놓고 토악질을 해댄다. 그것도 흙이라고 풀들은 그 곳에 뿌리를 박고 새 싹을 틔워낸다.
유용주의 ‘풀’이 김수영의 ‘풀’과 다르듯, 시 속의 사람도 당연히 다르다. ‘자전거 타고 내려오다 후배 차에 부딪힌 그 노인…통원 치료하라는 담당의사에게 입원시켜 달라고 애원하던 그 노인…현장검증 나가자고 말하자 벌떡 일어나 걸어나가던 그 노인/ 20년 넘게 대방동 한 귀퉁이 복덕방에 나가/ 밥 빨아먹고 있는 늙은 거머리, 그 노인’(‘거머리’ 중).
아이들 모두가 ‘미래의 주인공’은 아니듯, 젊은이 대다수가 ‘국가의 동량’이 아니듯, 상당수 노인도 세월만큼 욕심을 흘려 보낸 그런 존재만은 아니다.
얼핏 그는 가난한 자를 욕보이는 것 같은데, 그가 가난하기에 그의 욕보임은 타자화 되지 않는다. 제 삶의 반성이자 제 거처를 청소하는 일이다. ‘모욕으로 얼룩지는 삶의 자리, 숨결 사이로 자주 빠져 나가는 의지, 가라앉기 쉬운 감정과 거듭 배반 당하는 희망을 늘 그 주제로 삼으면서도, 뒤틀린 곳이나 막힌 곳이 없이 활달하다’(평론가 황현산)
그의 ‘구멍’ 연작 역시 사람 몸속에 있는 구멍이란 구멍은 모두 욕보인다.
‘…마지막 숨넘어 가고/ 한 입 가득 생쌀 머금을 때까지/ 끊임없이 / 아귀처럼/ 한시도 쉬지 않고/ 처먹고 뱉고/ 퍼 마시고 토하고/ 주절주절 아귀아귀’(‘구멍11’ 중)
하나 그 욕은 저만치 떨어진 남의 인생을 욕보임이 아니라 제 삶에 대한 반성이자 그 반성을 딛고 더 큰 구멍으로 회귀하려는 치열의 몸짓이다.
‘窟/ 出/ 얇디얇은 망막을 찢고/ 봄 햇살 돋는다’(‘구멍13’ 전문)
굴을 나와 온 세상을 덮은 말없는 봄빛. 소란한 시내를 벗어나 때로 봄빛 만개한 간월도에서 가난한 시인은 가난하지 않은 자세로 술을 마신다.
서산=박은주기자
jupe@hk.co.kr
■[문학기행] 유용주는 누구?
‘에그머니나 저것도 쌍판대기라고 미역국을 잡수셨나 초년 고생을 훤히 내다 보았을 좁은 이마에 벌써 갈매기 서너마리 밭고랑을 갈아 엎고 외고집 방안퉁수 칼귀에다 덕지적지 눈곱 낀 구멍 두 개가 흐릿하게 뚫려 있는 그 밑으로 지지리도 박복하게 주저앉은 구릉 지나면 하늘로 뻥 치솟아 비와 눈이 오면 찢어진 우산이라도 먼저 펼쳐야 하는 코터널하곤…’(‘자화상’ 중)
국거리 장단에 맞추면 딱 좋을 질펀한 이 ‘자화상’을 쓴 시인 유용주.
“전업 주붑니다”하고 자신을 밝히는 후덕한 인상의 이 시인은 생김새보단 거친 인생을 살아왔다. “건방진 말처럼 들리겠지만 사실 전 세상에 무서운 게 별로 없어요. 어차피 맨 몸으로 산 사람이니까요.” 실없는 말은 아니다.
전북 장수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 한 후 장수중 1년을 중퇴하고 병든 어머니의 약값이라도 보태려 중국집에 취직했다. 전남 보성 ‘명월각’에서 사기 자장면 그릇을 힘겹게 배달했다. 주는 밥이 모자라 손님들이 먹다 남긴 음식으로 허기를 보충했다. 누나 손에 이끌려 대전에 취직했다. 제빵공장, 음식점 종업원으로 일하다 또 다시 누나를 따라 서울로 왔다. 중학교 마치는 게 꿈이었다. 시간이 나면 공부할 수 있는 데를 찾아 다니다보니 여러 곳을 전전했다. 서울로 올라와 금은방에 취직했다. 그가 한 일은 금반지에 광택을 내는 일. 파란 약물을 묻힌 실에 반지를 왕복운동 시키면 윤이 났다. 지문이 닳아 없어지고, 나중엔 피가 났지만 감각이 무뎌져 아픈 줄도 몰랐다.
1975년 정동제일교회 야학에 다녔는데, 청년반 교사가 쓴 윤동주의 ‘서시’를 보고 “아 저런 시 한번 써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집에서 떨어져 직장생활을 하던 어머니에게, 친구에게 편지만 죽어라고 써봤지 ‘시’라는 것을 본 것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배관공 벽돌공 우유배달 신문팔이 구두닦이 형틀목공(집 내부의 틀을 만드는 목수) 등 많은 일을 했다. 시인이 되고팠지만 벽은 높았다. 군대를 졸업하고 종로2가 일식집 주방에서 뚝배기를 닦던 그는 1985년 시인 정진규씨가 강의를 하던 한국일보 문화센터 시창작교실에서 시강의를 들었다. 돈내고 강의를 들은 것은 1년 정도, 1989년까지 그저 정선생을 따라 다녔다. 황신숙 신경숙 김영미 등은 그를 ‘정진규 가방 모찌’라고 놀렸다. 등단 없이 ‘오늘의 운세’를 냈지만 좌절. 살고픈 마음도 없어 조치원으로 내려가 레스토랑 웨이터 생활을 했다. 거기서 교원대 학생이던 아내를 만났다. 레스토랑 주인이 ‘시인 웨이터’라고 소문을 냈던 차, 손님으로 안면이 있던 그녀가 새벽 두시 일을 정리하고 나가보니 기다리고 있었다. 1991년 창비 봄호에 신경림씨가 그를 ‘천부적인 재질’이라며 극찬했다. 이어 신작을 달라며 창비에서 편지가 왔다. 그해 가을호, ‘목수’ 등 3편이 실렸다.
두 권의 시집을 냈던 그는 이제 700매의 원고, 시집 두 권 분량에서 조금 모자란 시들을 갖고 있다. 시집을 낸 후에는 산문에 매달려 볼 생각이다. “삶이 없어져 버린 것 같다. 삶으로 쓰는 시집은 두세권이면 족하다.” 이문구의 글처럼 질펀하면서도, 박상륭씨만큼 깊이가 있는 그런 산문에 그는 매달려 볼 작정이다. 때문에 당분간은 노동은 그만 두고 글쓰는 일에만 전념할 생각이다. 서산에서 교편을 잡은 아내와 딸을 건사하는 ‘전업 주부’이자 밤에 잠을 잘 못자는 전업작가. 그의 직업이다.
박은주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