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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숭호가 만난사람] 故 엄익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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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숭호가 만난사람] 故 엄익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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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05.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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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이제 세상에 없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그는 기자를 만난 이틀 뒤, 자신이 세상을 떠나야 할 날이라고 말했던 바로 그 날 세상을 하직했다. 지난 3일 오후 3시 사망한 엄익준(嚴翼駿) 전 국가정보원 2차장이다.60-70년대의 중앙정보부, 80-90년대의 안기부, 90년대 후반부의 국정원에 이르기까지 34년간 ‘음지’에서 ‘정보맨’으로 일하다 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던 그를 만나야겠다고 마음 먹은 것은 그가 사생관이 뚜렷하고 자신의 직업에 대한 자부심이 남다르며, 초인적인 투병을 하고 있다는 기사를 읽고 그의 일생을 정리하는 것도 의미가 있겠다는 생각에서 였다.

그의 가족과 측근들도 이런 취지를 이해, 마지막 인터뷰 요청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미 의사들이 ‘길어야 보름 정도 더 연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정을 내린 그에게 준비해간 질문을 모두 다 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는 몇가지에 대해서는 환자의 목소리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또렷하게 대답해주었으며 나머지 질문에 대해서는 미리 준비해둔 듯 보좌관을 통해 자신의 심경을 밝혔다.

산소호흡기를 단 채 누워있던 그는 측근이 몸을 숙여 귀에 대고 한국일보에서 인터뷰를 하러왔다고 하자 웃음을 지었다.(이미 의식이 있다가 없다가 하는 상태였던 그는 기자가 찾았을 때 몇 시간만의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있었다.) 그의 첫마디는 “공직자가 공직에 있을 때 쓰러지는 것은 영광이다.

나는 언제나 영광스러운 죽음을 생각하고 있었다”라는 것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병실에 있던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컸다. 하지만 힘들게 웃음을 지어 보였던 것처럼 목소리를 내기 위해 힘을 모으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는 이어 “내 이 모습을 찍지는 말라”고 당부했다. 산소호흡기를 단 모습을 세상에 보이기 싫다는 뜻이었다. 자신에 대한 자존심과 공직자로 일생을 보냈다는 자부심은 인터뷰 내내 감지됐다.

그는 지난 2월22일 ‘사망선고’를 받았다. 지난해 11월부터 시작된 허리통증을 단순히 과로로 인한 것으로 알고 디스크치료를 받기 시작한 지 약 세 달 만이었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그의 허리통증을 치료하던 한방병원에서 “디스크보다 훨씬 심각한 병인 것 같다.

진단을 다시 받는 게 좋겠다”는 말을 듣고 종합병원에서 검진한 결과 말기암이라는 판정을 받았다. 암세포는 이미 그의 간을 완전히 손상시킨 후 척추와 폐로 옮겼으며, 회복이 불가능하므로 직장을 그만 두고 남은 기간 진통제로 고통을 달래는 수밖에 없다는 게 의사들의 말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영광스런 죽음을 맞기 위한 준비에 들어갔다. 그는 우선 자신의 병을 부인(임미대자씨·林美代子.59)과 오랫동안 동고동락해온 보좌관에게만 알리고 여느 때와 다름없이 출근을 계속했다.

출근도 그냥 건성으로 한 것이 아니라 34년간 해온 대로 남들보다 한시간 이른 매일 오전 8시에 자리에 앉아 보고를 받고 지시를 내리는 등 평소와 다름없었다.

이 때문에 그가 매일 집에서는 암의 고통 때문에 부인을 부둥켜 안고 “왜 이 괴로움을 내가 겪어야 하냐”고 울부짖으며 밤을 지샌다는 것을 안 사람들은 없었다.

그는 오히려 부하 직원들이 자신의 병을 알아 차릴까봐 출근 직후 집무실로 들어가 거울을 보며 혹시라도 남의 눈에 이상한 점이 있나, 매무새를 다듬고는 의자에 앉아 보고를 받기 시작했다. 회의에서는 건강할 때보다 더 큰 목소리와 날카로운 눈매로 업무를 챙겼다. 그의 이런 모습에 그의 보좌관도 깜빡 속아 “차장님, 건강이 좋아지신 것 같습니다”고 말을 건넸다가 그의 허허로운 웃음을 보곤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리곤 했다.

그의 이런 투병생활은 남북정상회담개최가 확정된 후인 지난 4월7일까지 50일 가까이 계속됐다. 한때는 워낙 고통이 심해 사직을 고려하기도 했지만 남북협상과 총선이라는 국가대사를 앞두고 그만 둘 경우 책임회피라는 생각 때문에 다시 마음을 고쳐먹었다.

아픈데도 물러나지 않으면 자리에 연연한다는 비난이 있을 거라고도 걱정했지만, 자신이 떠나면 정치적 이유로 상당기간 그 자리가 공석으로 남아 업무공백과 조직의 동요가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점이 먼저 고려됐다. 업무에 몰두하는 것이 암의 고통을 덜어내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생각도 했다.

그의 지인들은 그가 ‘내 최고의 후원자는 내 직속 상관’이라는 말을 자신의 좌우명이라고 말하는 것을 여러번 들었다.

‘직속 상관이 최고의 후원자’라는 그의 좌우명에는 갖가지 연을 이용해 세상을 살기보다는 직속 상관으로부터 인정을 받는 것이 훨씬 더 보람있는 공직자의 삶이며, 이를 위해서는 언제 어디서나 직무에 최선을 다하겠다는 뜻이 함축돼 있다고 그의 한 측근은 전했다.

기자에게도 그는 “남북정상회담을 앞두고 할 일이 많은 원장님을 못 돕게 돼 죄송하다”는 말을 남겼다.

그가 유난히 직책과 직무에 성실했다는 일화는 이밖에도 많다. 1994년 결혼했던 그의 딸은 식장에서 아버지의 에스코트를 받지못했다.

당시 판문점에서 열렸던 남북협상 대표단이었던 그는 협상이 예정했던 시간에 끝나지 않자 같은 날 열린 딸 결혼식 참석을 포기했다. 그의 딸은 이때문에 아버지 대신 신랑과 함께 식장에 입장, 하객들로부터 감동과 격려에 찬 박수를 받았다. 이때도 그는 ‘공직이 우선’이라는 말을 한 것으로 전해진다.

젊을 때 그의 별명은 ‘밀대 사무관’이었다. 비교적 젊은 나이에 사무관으로 승진, 당시의 중앙정보부 전북지부에서 남보다 일찍 출근, 사무실 바닥을 걸레로 밀어내던 그에게 부하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위세당당했던 중정의 나이 많은 지방조정관들도 그의 이런 모습에 마음으로 따르게 되었다.

“직속 상관을 잘 모시는 것만큼 부하들에게는 건방지지 않은 상관이라는 모습을 심어주는 것이 상관의 태도”라던 그는 남북관계를 위해 오랫동안 키워온 후배들을 제대로 지원해주지 못하는 것이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병원에 입원한 뒤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켜보려는 가족과 측근들에게 “나는 이미 두 번 죽었다가 살아난 사람이다.

내 생명을 연장시키려하지 말라”고 몇 번이나 당부했다. 장교로 복무중일 때 그는 한 번은 중화상으로, 한 번은 당시로서는 회생불능이었던 유행성출혈열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받았지만 간호장교였던 부인과 어머니의 간병으로 목숨을 구했다.

유행성출혈열에서 회복한 그에게 군에서는 제대를 권유했지만 그는 “회복되었는데 왜 제대를 해야 하느냐”며 거부, 만기제대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를 간병하다 과로로 숨졌다. 그가 “하느님과 주변의 도움으로 인생을 덤으로 살았다, 후회는 없다”고 말한 연유다.

“밖에서는 뭐라 해도 국가를 위해 꼭 필요한 조직에서 평생을 일한 것이 자랑스럽다”는 말을 되뇌었다는 그의 병실을 떠날 때야 병실 한 켠을 채우고 있던 있던 난 화분들이 눈에 띄었다. 그중 하나에는 ‘쾌유를 빕니다. 황장엽, 김덕홍’이라는 글이 붙은 화분이었다. 그는 그렇게 공들여온 남북정상회담을 지켜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정치적 중립 지켜야 국민이 국정원 믿는다

1966년 중앙정보부에서 집으로 보내온 ‘정보부 취업권유문’을 받고 중정에 취업한 그는 34년 재직중 두 번 어려움을 겪었다. 안기부 ○○도 지부장으로 있던 그는 지방선거가 끝난 직후 본부대기 발령을 받았다. 주변에서는 여당 도지사 후보가 낙선한데 대한 문책인사라고 말했다.

국민의 정부가 들어선 후 ‘북풍사건’이 불거지자 그도 다른 안기부 간부들과 함께 자리를 떠나야 했다. 둘 다 정치적인 이유로 인한 것이었다.

그는 국정원에 사표를 내기 직전까지 전국 지부를 순회했다. 그의 지부 순회는 총선을 앞두고 국정원의 정치적 중립을 강조하기 위해서였다.

그는 ‘선거기간 중 국정원이 해야 할 일과 하지말아야 할 일’을 일일히 열거하면서 전국을 돌았다. 그는 세상을 뜨기전 주변을 정리하면서 “이번 선거에서 우리 조직과 관련한 잡음이 별로 없는 것 같다. 자랑스럽다”고 말했다.

지난해 민혁당 간첩단 사건 발표때 국정원은 북한 잠수정에서 찾아낸 쪽지가 단서가 되었다는 등 세세한 수사과정까지 밝혔다. 경찰도 구체적 수사과정은 범죄인들에게 도움이 된다는 이유로 밝히지 않는 것이 통례다.

그는 수사과정을 그렇게까지 자세히 밝혀서는 안된다는 내부반발에 “수사과정을 숨기면 국민들이 납득하지 않을 수 있다. 앞으로 부담으로 돌아오더라도 다 밝혀야만 우리 조직이 하는 일을 국민이 인정하게 된다”며 발표를 관철했다.

그에게도 험담과 잡음이 없지는 않았다. 지난 대선때 누구를 찾아갔느니, 누구를 밀었느니 하는 말들이 있었지만 구체적 증거를 제시하는 사람은 없었다. 두고 봐야 할 일이지만 사실이 아니기를 바랄 수밖에 없다.

어쨌든 국정원의 새 모습은 이제 남은 사람들의 몫이다.

◆약력

전주고(1960), 고려대 정외과 졸업(1964)

중앙정보부 취업(1966)

안기부 제3특보(1995)

안기부 3차장(1997)

국정원 2차장(1999)

편집국 부국장 soongchu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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