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호(성신여대 정외과 교수)youngho@cc.sungshin.ac.kr
북한이 전면 남침을 개시했다는 주한 미대사 무초(John J. Muccio)의 최초전문이 미 국무부에 도착한 것은 워싱턴 현지시간으로 1950년 6월 24일 토요일 저녁 9시26분(한국시간 25일 새벽 6시26분)이었다. 당시 워싱턴은 섭씨 36도를 오르내리는 무더운 날씨였는데 워싱턴의 여름은 고온다습하기 때문에 이날의 실제 체감기온은 40도에 가까웠다.
이 더위를 피해 미국의 주요 정책결정자들은 모두 다른 도시나 교외로 휴가를 떠나거나 나름대로의 휴일을 즐기고 있었고, 북한의 남침이 임박했다는 어떤 정보도 갖고 있지 못했다.
이 전문의 내용을 전화로 전달받은 애치슨 국무장관은 미주리주의 고향 인디펜던스시티를 방문 중이던 트루먼대통령에게 즉시 보고하고, 이 문제를 유엔안보리에 상정해야 한다는 동의를 받아냈다. 이로써 한국전쟁이 발발한 지 7시간만에 이 소식은 미국의 정책결정의 계통을 통해 최고 정책결정권자인 트루먼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워싱톤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트루먼은 일요일 저녁 불레어하우스에서 저녁식사를 겸한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할 것을 지시했다.
닭고기튀김과 양상치에 러시아 소스를 곁들인 간단한 식사를 마친 뒤 저녁 7시45분부터 미국의 한국전쟁 개입 여부를 결정하게 될 첫번째 역사적인 회의가 열리게 된다.
이 회의에서 트루먼을 비롯한 미국의 정책결정자들은 모두 북한의 남침 배후에 소련이 있다는 사실을 확고하게 믿고 있었다. 특히 트루먼은 영국과 프랑스의 히틀러에 대한 유화정책이 제2차 세계대전을 불러왔듯, 미국이 한국의 적화를 막지 못하면 나중에는 계속되는 공산주의의 팽창을 저지하려는 과정에서 인류는 제3차 세계대전을 겪게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트루먼으로서는 우선 북한의 남침이 미국의 봉쇄선상에서 소련의 전면적인 공격의 전초전인지를 판단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왜냐하면 남침을 통해 소련이 미국과의 전면전이나 제3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겠다는 의도를 갖고 있다고 한다면 미국은 당시 준비되어 있던 전면전에 대비하기 위한 비상전쟁계획을 즉시 발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트루먼은 미국의 봉쇄선 주변의 전지역에 대한 소련의 공격 가능성 여부를 점검하라고 국무부와 국방부에 지시하고, 공군에는 극동에 있는 소련 공군기지들에 대해서 철저하게 조사하고 자신의 지시가 있을 경우 즉시 모든 기지들을 파괴시킬 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갖추라고 지시했다.
조사 결과 미국은 북한의 남침은 전면전을 위한 전초전이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한국전쟁의 개입을 결정하게 된다. 우선 한국의 적화는 유엔과 함께 한국의 탄생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미국의 위신에 심대한 타격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또한 미국의 불개입은 일본을 비롯한 서구 동맹국가들의 대미 신뢰도를 떨어뜨릴 것이라는 사실을 우려했다. 이러한 이유들로 한국전쟁 개입을 결정하면서 트루먼은 미국의 개입이 한반도에서 소련과의 전면전으로 비화되지 않도록 유의하고, 한국전쟁을 국지전화해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미국의 지상군 투입 결정에는 6월29일 수원과 영등포지역을 직접 시찰하고 나서 보낸 맥아더의 보고서가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이 보고서에서 맥아더는 지상군을 투입하지 않고서는 국군이 현재의 전선을 지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38선도 회복할 수 없다고 지적하고, 즉시 1개 연대를 투입할 것과 나중에 2개 사단을 증파할 것을 요청했다.
6월30일 새벽 5시경 트루먼은 1개 연대의 투입을 허용했고, 오전에는 2개 사단 투입을 결정함으로써 미국의 한국전쟁 참전은 본격화했다.
맥아더는 미8군 제24사단 21연대의 투입을 결정했고, 이 부대는 7월1일 부산공항에 도착하여 7월5일 오산에서 인민군과 최초로 교전하게 된다. 또한 7월 3일 미국은 본토로부터 해병대 1개 연대, 60대의 B-29와 150대의 F-51을 포함한 공군력을 맥아더에게 추가로 증원해줌으로써 단순히 일본 주둔병력만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미국 내의 군사력을 본격적으로 투입하게 된다.
7월 12일 현재 미국은 4개 사단을 한국전쟁에 투입하게 되고, 이때 미 합참은 한국에서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한 방어선들을 본격적으로 검토했다. 미 합참은 나중에 ‘부산방어선’혹은 ‘낙동강방어선’으로 알려지는 지역을 교두보로서 확보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보고, 7월31일 미8군 사령관 워커장군이 미 제25사단을 대구전선에서 인민군 제6사단이 포진한 마산지역으로 은밀하게 이동시킴으로써 부산방어선은 그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한국전쟁 개시 이후 부산방어선을 중심으로 전선이 고착화됨으로써 공군력에서 우위를 확보한 미국이 전쟁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된다. 이미 맥아더는 적의 후방을 공격하기 위한 상륙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는데, 미 합참은 인천지역은 간만의 차이가 매우 크고 항구에 이르는 수로가 협소하기 때문에 군산지역을 선택할 것을 권고했다.
합참과 마찬가지로 맥아더도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확률을 5,000분의 1로 보았다. 그러나 맥아더는 이 상륙작전의 성공이 전혀 불가능할 것이라는 평가에서 오히려 이 작전의 성공을 확신했다. 왜냐하면 자신과 합참이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할 수 없다고 본다면 적도 역시 미국이 인천에서 대규모 상륙작전을 감행하리라고 감히 상상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당시 북한은 물론이고 마트베에프(A.I. Matveev)라는 장군을 군사연락관으로 파견하여 한국전쟁의 작전상황을 일일이 보고받고 필요한 작전지시를 내리고 있던 스탈린조차도 인천상륙작전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 인천상륙작전의 성공 이후 미국은 38선 돌파를 결정함으로써 한국전쟁은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북한의 남침 계획에 대한 워싱턴의 사전인지 여부
미국의 중앙정보국과 군사정보기관들이 남침의 임박성에 대해서 어느 정도 정보를 수집하고 그 가능성을 예측하고 있었느냐 하는 문제는 현재도 학자들 사이에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1950년 6월 26일 미 중앙정보국장 힐렌코에터(R. H. Hillenkoetter)제독은 백악관에서 트루먼과의 면담을 마치고 나오면서 “북한의 남침에 놀랐는가”라는 기자들의 질문에 “북한의 남침 가능성은 1년전부터 예상돼 왔지만 정확한 타이밍은 전혀 예측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그는 “한반도에서의 정보는 전적으로 맥아더 사령부에 의존하는가”라는 질문에 “많은 정보를 그 사령부로부터 받지만 중앙정보국은 이 지역에 자체의 요원을 확보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6월 27일 상원에 출석한 힐렌코에터는 중앙정보국은 북한이 군비를 증강하고 병력을 38선에 전진배치하고 있다는 정보를 한국전쟁 발발 이전에 1950년 6월 19일자의 중앙정보국 보고서를 통하여 전달했다고 말했다.
6월 28일 상원 위원회에 출석한 국방부 군사원조국장 렘니처(L.L.Lemnitzer)는 상원의원들로부터 중앙정보국이 북한이 38선 남쪽으로 이르는 길들을 새로 건설하고 38선 부근의 주민들을 소개시키고 병력을 전진배치하는 등 북한의 남침이 임박했다는 정보를 국방부에 제공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방부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았다.
그는 국방부가 북한이 남침을 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몇 개월 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러한 상황은 소련의 지배하에 있는 주변 국가들에서도 실질적으로 똑 같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답변했다.
그리고 그는 중앙정보국을 포함하여 어떤 정보기관도 한반도에서 곧 공산주의자들이 전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예측한 보고서는 없었기 때문에 북한의 남침은 국방부에게는 매우 놀라운 사실이었다고 결론지었다.
상원에서 증언을 마치고 되돌아온 후 렘니처는 한국전쟁 직전 중앙정보국이 제공한 정보보고서들을 모두 검토해 보았지만 북한의 남침이 임박하다는 사실을 지적한 보고서는 찾을 수 없었다고 지적하고 있다. 현재 공개된 6월 19일자의 중앙정보국 보고서에는 주민의 소개나 군용도로의 건설에 관한 일체의 언급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
만약 당시 이러한 정보들이 실제로 국방부 정보국에 입수되었다면 이 문제는 남침이 임박했다는 정보로 판단될 수도 있었을 것이지만, 이러한 정보는 국방부에 보고된 적이 없었던 것으로 현재 알려지고 있다. 결국 미 정보기관들은 북한의 남침을 예측하는데 실패했지만, 오히려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미리 알고 사전에 철저한 대비책을 마련한 것은 춘천지역을 담당한 국군 제6사단이었다.
◆ 미국의 비상전쟁계획안
미국은 소련과의 전면전에 대비하기 위하여 1946년 3월부터 암호명 핀서(PINCER)라는 극비의 비상전쟁계획(Emergency War Plan) 마련에 착수했고, 1947년 6월 16일에는 암호명 문라이즈(MOONRISE)라고 불리우는 극동에서의 미국 비상전쟁계획안을 완성했다.
약 160페이지에 달하는 이 안은 소련이 미국과 전면전을 시작할 경우 아시아 지역에서 45개 사단을 동원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다. 당시 이 지역에서 미국이 동원할 수 있는 사단은 약 6개 사단에 불과했기 때문에, 문라이즈는 소련이 전쟁 개시 40일(D+40)만에 만주, 150일(D+150)만에 중국의 황하 이북을 점령할 것이라고 보았다. 한반도의 경우 이 안은 소련이 인민군과 함께 소련군 6개 사단을 동원할 것으로 보고, 이 경우 한국은 전쟁 개시 20일(D+20)만에 완전히 점령될 것으로 예상했다.
소련군의 진격은 완전히 수적으로 열세에 있는 2개의 주한 미군 사단에 의해 차단될 수 없고, 일본 주둔 4개 사단을 한국으로 증원시키는 것은 미국에게 한국보다 더 전략적으로 중요한 일본의 방어를 위협할 것이기 때문에, 남한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은 즉시 일본으로 철수해야 한다고 결론짓고 있다. 특히 문라이즈는 나중에 애치슨의 프레스클럽 연설을 통해 널리 알려지는 베링해협-동해-황해를 잇는 아시아에서 미국의 도서방위선 개념을 제시하고 있다.
이처럼 소련과의 전면전이 발생할 경우 한국은 미국의 도서방위선에서 제외되었고, 이것은 한국전쟁 직전인 1949년 12월 8일 미 합참이 승인하는 비상전쟁계획안인 오프태클(OFFTACKLE)에 의해 그대로 수용되었다.
결국 미국은 소련과의 전면전이 발생할 경우 아시아에서 한국을 미국의 도서방위선에서 제외했다. 그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병력과 군비를 급격히 감축한 미국이 아시아의 모든 지역을 군사적으로 지킬 수 있는 군사적 자원을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록 한국이 소련과의 전면전 발생시 군사전략적 이유로 인하여 미국의 방어선에서 제외되었지만, 북한의 남침이 소련의 전면전의 일환이 아닌 한반도에 제한된 국지전이라고 판단한 미국은 정치전략적 고려 하에서 한국전쟁에 개입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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