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들은 도시를 만들었지만 고대 그리스의 인간들은 반드시 그 도시에 극장을 만들었다.그리스 문명의 상징은 극장이다. 지금 그리스에 남아있는 극장 유적은 80여 군데이다. 지중해 연안의 하염없는 식민지 지역에 남겨진 폐허까지 망라하면 200 군데가 훨씬 넘는다. 이런 유적도 고대 그리스의 비극이 열화 같은 환영 속에서 공연되던 시대의 수효에는 훨씬 못미치고 있다.
내가 그리스의 여기저기를 떠도는 일은 결국 극장의 유적에 발 디디는 일이 되고 말았다. 도대체 옛 그리스 사람처럼 예술을 사랑한 이들이 어디 있던가. 그들의 수많은 비극들과 그 비극 후렴으로서의 희극이야말로 고대 그리스 사회의 호흡이었으며 그 비극 속의 영웅들은 고대 그리스 사람의 정신적 존재 이유이기도 했다.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바위산 밑에 디오니소스 극장이 있다. 기원전 6세기 그리스 비극이 개막된 곳이었다. 오랫동안 풀더미에 덮인 폐허로 버려진 것을 이제 정성껏 보존함으로써 고대의 영광을 희미하게 떠올려 준다.
신화 속의 시신(詩神)들은 기억의 여신이 낳은 처녀신이다. 그들의 총기있는 기억력에 의해 비극의 대사가 줄줄 외워졌다. 그런 시신들의 넋을 이어받은 배우들이 바로 1만 5,000명의 관중을 감동으로 몰아넣는 것이다.
극장은 어느 곳이나 똑같은 형태이다. 비록 크고 작은 차이는 있을지언정 깊숙한 원추형으로 만들어진 공간은 거기에 비극의 축제가 채워지기 전에 이미 그리스의 얼굴이었다.
관람석의 어느 좌석에서도 무대가 잘 보이도록 설계된 극장이다. 본디 거기에서 중심이 되는 곳은 오르케스트라라고 부르는 곳이다. 무도장이다.
디오니소스제(祭)는 먼저 모든 시민들이 함께 참가한 뒤 신관의 집전에 따라 제례를 마치고 나서 춤추는 것이다. 그 춤이 끝나면 시민들은 저마다 관람석으로 올라가고 비극이 공연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예술은 행위를 모방한다고 말했다. 극장의 잔치 역시 인간의 춤이라는 행위가 있고 그 행위의 모방으로서 예술행위가 이어지는 셈이다.
그런데 부여나 고구려의 축제가 아직 봄이 오지 않은 추위 속에서 며칠이고 이어진 것처럼 그리스 디오니소스제도 하필 1월이나 2월 초에 열렸다. 그곳의 겨울은 헤시오도스의 시에 묘사된 그대로 대지에는 얼음이 깔리고 바다는 얼음장같은 파도가 덮치는 계절이다.
그런 추위 속에서 사람들의 축제가 열리는 것은 무엇보다 지루한 겨울을 그들 자신의 의지로 쫓아야 한다는 뜻이 들어있는 듯하다.
그들은 차디찬 대리석 계단 좌석에 앉아 춤에 지친 몸을 식혀가며 비극의 여러 사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이 비극 공연이 국가적인 행사로 되는 데는 기원전 6세기의 한 참주가 시민들을 예술을 통해서 달래고자 한 문화정책 때문이었다. 그 뒤로 도시국가 민주정(民主政)이 수립되는 것과 함께 시민 전체의 축제로 발전한 것이다.
그러므로 극장은 철저하게 시민의 광장이 되기에 이르렀다. 어느 좌석도 특권층에게 배정될 수 없고 어느 좌석도 똑같은 민중의 공간이었다. 아무데나 앉아도 그 좌석에서 무대의 극을 충분히 관람할 수 있다. 거기에는 어떤 계급도 없다. 어떤 빈부의 차이도 없다. 있는 것은 전체의 아름다움이다. 처음에는 무료입장이다가 차츰 국가가 입장료를 물어주었다.
물론 이 무대에서 희극이 공연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비극에 비할 바 없이 그것은 부차적이다.
왜 비극인가. 고대 그리스 사회는 신화세계와 현실세계와의 무의식적 일치의 사회였다. 신들과 인간(영웅)들이 뒤엉키기도 했고 신들에 이어 영웅들이 그 시대의 주역이 되기도 했다.
바로 이같은 복합적인 신인동서(神人同棲)가 그리스 사람들에게 본질적인 호응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신들은 불사(不死)의 음식을 먹고 신주 넥타르를 마시며, 그들에게는 피가 아니라 이코르라는 환한 액체가 흐른다. 몸에는 암브로시나라는 향유를 발랐으며 인간이 바치는 희생물도 아주 좋아했다. 제례에서 쓰이는 연기도 아주 좋아해서 신들의 코가 벌름거리는 것이다.
영웅은 바로 이러한 신들의 고귀한 혈통을 잇는 존재이고 그 풍모와 체력 그리고 성격이 신과 같은 수준이었다. 그래서 영웅은 반신(半神)이기도 하다. 아마도 영웅은 각 부족의 기억 속에 있는 조상에 대한 이미지와 관련되는 것 같다. 또한 청동기시대의 왕후와 귀족이 그런 영웅상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이상으로서의 영웅상은 운명, 비장한 삶 그리고 영웅적인 비극을 겪어내는 인간 존재이지 않으면 안 된다. 평범한 사람이 비참하게 사는 일은 자업자득 정도로, 말하지만 영웅에게 불가결한 비극이야말로 한층 더 영웅적이라는 것이다.
그들에게 영광의 진정한 의미는 비극으로 끝나는 파란만장의 생애 없이는 조금도 가능하지 않다.
그리스는 역사로서도 복잡하다. 제우스도 다른 족속의 신이거나 침략자였다. 여러 신들도 다른 곳에서 들어온 경우가 적지 않다.
그래서 그리스 범신론은 관념이기보다 현실 쪽이다. 이런 사실로 미루어 제우스의 수많은 여성편력도 그가 다른 신들을 널리 포섭해가는 과정을 반영하고 있는지 모른다.
아무튼 그리스 비극은 그리스뿐 아니라 세계 도처에 그 영웅의 생애를 통한 서사와 서정을 퍼뜨려서 오늘날 모든 곳에서 그것은 마치 그리스 신들처럼 하나의 젊음으로 살아있는 것이다. 비극이야말로 인간에게 가장 잘 진실을 드러낸다.
그런 비극의 무대인 그리스 극장에 또 다른 의미가 있다. 그것은 극장의 어디에도 중심이 없다는 사실이다. 무대 양쪽 가장자리에서도 무대가 잘 보이므로 소외가 성립되지 않는다. 또한 눈이 잘 안보이는 노인이나 불편한 사람 이외에는 누구나 먼저 앉는 곳이 제 좌석이다.
이것은 정치적 사회적 중심체제를 인정하지 않는 것을 뜻한다. 중세 이래 서구의 도시구조들은 으레 교회와 성주의 거처를 중심으로 공공건물과 주거환경이 속해있는 것이다. 극장 역시 그러한 지배구조로 설계되어 특등석과 3등석이 엄연했다. 그것은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더욱 더 노골적이었다.
하지만 고대 그리스의 민주정치 문화에서의 극장은 사람들 각자가 결코 주변화되지 않는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다.
아마도 오랜 중앙집권적인 사회체제에 길들여진 이래 오늘날의 탈중심적인 전망이야말로 그리스 극장의 보편적인 미덕을 새롭게 하는지 모른다.
지금 그리스에는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그리스는 거의 아무것도 없다. 유적과 잔해뿐이고 폐허밖에 없다. 그래서 그 곳은 그들의 음울한 기독교로 살아가면서 옛 그리스의 폐허로 돈을 벌고 있는 것이다.
검은 옷과 긴 수염의 정교회 사제와 자책과 참회의 아픔에 익숙한 산중의 수도승만이 있고 어디에도 옛 신들과 영웅의 그 자유분방한 활약은 보일 리 없다.
다 떠나버렸고 다 흩어져 버렸다.
어디 그 뿐인가. 옛 폴리스와 민주주의도 수많은 배심원만으로 행해지는 인민재판의 사법도 오랜 침략과 재앙 그리고 독재와 함께 어디로 사라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리스 사람들은 피가 끓고 있고 제련되지 않은 감정이 풍부했다. 나는 그런 그리스 사람들이 이탈리아인보다 훨씬 한국 사람과의 동질임을 알게 되었다.
새해 첫날 밤 밀레니엄 잔치는 그곳이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서구문명의 첫 발상지라는 긍지에 실려서 그런 행사는 더 설치는 것 같았다. 나는 아크로폴리스에 가 있었다. 파르테논 신전에서의 숙연한 신탁의 제례와 비극의 무대를 기대했으나 그곳은 흔하디 흔한 불꽃놀이와 레이저광선의 곡예밖에 없었다.
다음날 그 바위산 넘어 아고라(시장)에 갔었다. 사람 하나 얼씬거리지 않고 텅 빈 폐허였다.
아크로폴리스 앞산이 신들의 거처라면 그 아래의 아고라는 인간군상이 살아가는 시장이었고 철학과 문학의 담론이 밤낮을 가리지 않던 대화의 광장이었다. 마누라가 둘이던 소크라테스도 집에서는 무능거사였었으나 신발도 없이 맨발로 여기에 오면 수많은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그의 현란한 화술로 전개되는 세계해석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그들 중에 애제자 플라톤이 있었다.
30년이나 그칠 줄 모르던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소크라테스는 그의 무신론과 국가제도 비판 그리고 부모와 연장자에의 불경죄가 씌워져 오랜 연적(戀敵)이자 정적(政敵)인 배후인물에 의해 사형집행에 이르는 비극적인 생애를 남긴다.
그리스는 이제 하나의 기억이다. 그리스 신들 가운데는 기억의 신이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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