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공백을 깨고 거듭난 명동 창고극장이 또 다른 탄생의 준비로 바쁘다.서울 중구 저동 삼일고가도로 남단 주택지대 한쪽 끝을 비집고 들어 앉은 품새는 요즘 감수성으로 비춰 보자면, 공연장이라는 이름을 내걸기조차 민망스럽다. 세월의 침식이 짙게 배어 있는 출입 통로는 에누리 없이 달동네 초입의 형상이다. 명동성당 옆의 고지대, 외관은 30년 전 그대로다.
그러나 이 곳은 지금 우리 시대에 맞춰, 발빠른 변신이 이뤄지고 있다. 40여㎙ 떨어진 이화빌딩 5층의 연극문화집단 창작마을(대표 김대현) 사무실이 그 진원지다. 컴퓨터에는 극장 공연 기획, 출판, 광고 기획, 창작마을 회원(410명) 관리, 신인 희곡 작가 그룹과의 사업 등 현안들이 담겨있다.
창고극장의 가장 큰 자랑거리는 유서 깊은 전통이 그들에 의해 새롭게 거듭난다는 점. 그 푸른 힘이 없었던들, 창고극장의 명성은 추억거리로만 존재했을 것이다. 아닌게아니라 1990-98년은 인쇄공장에 인수돼 기계 소리만 요란했던 곳이었다.
그러나 희곡작가집단 창작마을(대표 김대현)이 99년 2월부터 한 달 꼬박 손으로 쓰레기를 치우는 등 대대적 복원 사업을 벌여, 50평에 110석의 아담한 극장으로 부활했다. 곧 이어 3월 벌어졌던 ‘창작마을 단막극제’는 연극학도를 중심으로 연일 만원, 이 극장 최대의 성황이었다.
75년 문을 연 뒤, 극장의 이름이 바뀌기만 다섯 차례. 왕년에 문화를 조금이라도 안다는 사람들에겐 단골 술집처럼 친숙하던 이름들이다. 에저또 창고극장(75년 5월-75년 12월), 삼일로 창고극장(76년 5월-83년 7월), 떼아트르 추 삼일로(83년 8월-85년), 삼일로 창고극장(86년 9월-90년 10월)에서 현재의 명동창고극장에 이르렀다.
특히 이곳의 1인극 무대는 대학로 연극은 따르지 못할 실험정신이 가득찼다. 76년 연출가 오태석씨가 배우로 나선 1인극 ‘약장수’, 모노 드라마의 대명사로 기억되는 추송웅의 ‘빨간 피터의 고백’ 등 장안의 화제작이 여기서 만들어졌다. 증축 이후의 첫 무대 역시 원로 민속학자 심우성의 1인극 ‘결혼굿’이었다.
창작마을 사무실은 6월이면, 극장 바로 옆 30평짜리 건물로 옮길 계획이다. 극장과 가까워져, 단막극제나 우리 창작극 활성화 사업 등의 업무가 더 원활해질 것이다. 창고극장은 지난 3월부터 초대권 완전 폐기라는 변혁을 시도하고 있다. 지금 ‘우리 희곡 다시 보기’ 공연중. (02)777-7048
장병욱기자 aj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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