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교육- 탈학교 사회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별되는 중요한 점 가운데 하나는 뒷세대로의 기억의 전수다. 그 기억의 전수를 통해서 앎이 축적되고 문화와 문명이 생성, 발전한다. 그 기억의 전수는 흔히 교육이라고 불린다. ‘교육하다’라는 의미의 몇몇 유럽어 단어들(예컨대 프랑스어 eduquer나 영어 educate)은 라틴어 educare에서 온 것으로, 이 말은 어원적으로 ‘밖으로 끄집어내다’라는 뜻을 지녔다. 그러니까 잠재적 소질과 능력을 발현시키는 것이 서양 사람들이 생각한 교육이었다.
오늘날, 교육은 대체로 학교 교육을 의미한다. 그러나 학교가 보편화한 것은 인류의 역사에서 비교적 가까운 과거의 일이고, 더구나 그것이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보통교육·의무교육과 연관된 것은 고작 100년 안쪽의 일이다. 국가가 교육에 직접 개입해서 공교육 체제를 확립한 것은 프랑스 혁명 이후다.
중세 유럽에서 지적인 교육은 교회에 부설된 문답학교나 수도원학교에서 이뤄졌고, 기술교육은 길드 제도를 통한 도제교육의 형식을 취했다. 물론 볼로냐, 파리, 옥스퍼드 같은 곳에 일찍이 대학이 들어서기는 했지만, 이들 대학은 민중 일반의 삶과 무관한 것이었다. 근대 초기까지의 교육은 원칙적으로 사교육이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고대 유럽에 공교육의 전통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예컨대 고대 그리스의 도시 국가 가운데 하나인 스파르타의 교육 제도는 국가가 주관이 된 공교육이었다. 그 교육은 군인양성을 위한 군국주의 교육, 전체주의 교육이었다.
스파르타에서는 7세 이상의 모든 남자아이들이 기숙학교에서 공동생활을 하면서 20세까지 철저한 군사 훈련을 받았고, 30세까지 군복무를 하고 나서야 시민권을 부여받아 결혼을 할 수 있었다. 반대로 아테네에서는 개인의 교양을 함양하기 위한 사교육이 유행했다.
소피스트의 수사학교를 비롯해서 플라톤의 아카데미아, 아리스토텔레스의 리키움 같은 것은 사교육 기관의 원조라고 할 만하다. 크게 보아 스파르타의 공교육이 전체주의 교육의 기원이라면, 아테네의 사교육은 민주주의 교육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모든 공교육이 전체주의 교육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근대 이후 공교육을 가장 먼저 확립하고 그 체제를 깔끔하게 정비한 나라는 프랑스이지만, 프랑스의 공교육은 프랑스 민주주의의 버팀목이었다.
물론 교육의 중요한 목표가 사회의 통합과 개개인 소질의 계발이라고 할 때, 앞의 목표가 공교육에 의해서 그리고 뒤의 목표가 사교육에 의해서 더 효과적으로 달성될 가능성이 높다고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두 목표가 늘 조화를 이루는 것은 아니다.
사회의 통합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그에 따라 교육의 평등에 우선권이 부여될 때, 사회는 개인의 창의력을 억압하는 집단주의로 흐를 수 있다. 반대로 개인 소질의 계발이라는 목표가 지나치게 앞서고 그에 따라 교육의 자유를 외치는 목소리가 일체의 국가 개입을 허용하지 않을 만큼 높아질 때, 사회는 교육의 기회불균등이 야기한 계급 격차로 기우뚱거리게 될 것이다.
프랑스 혁명 이후 확립된 보통교육이 최하층 계급의 지적 수준을 끌어올려 민주주의와 사회통합에 기여한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좌파 이론가들이 교육제도나 학교를 보는 눈은 곱지 않다.
학교는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에 의해서 ‘이데올로기적 국가기구’라는 달갑잖은 딱지를 얻기도 했지만, 특히 사회학자 부르디외에 의해서 계급적 재생산의 공간으로 지목됐다. 부르디외는 ‘상속자들’(1964)이나 ‘재생산’(1970) 같은 저서에서 교육제도 안의 상징적 폭력, 특히 의무교육의 문화적 폭력을 지적했다.
겉보기에 사회적으로 중립적인 과학 지식을 전수하는 곳으로 비치는 학교는, 부르디외가 보기에, 기존 질서에 의해 정당하다고 판단된 특별한 문화를 전수하는 곳, 문화적 전횡의 공간이다. 지배집단이나 지배계급의 문화에 맞추어 특정의미는 선택하고 다른 의미는 제거함으로써, 즉 상징적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기존의 힘의 관계를 굳건하게 하는 것이 교육제도라고 그는 말한다.
공교육의 필요성 자체를 부인하지는 않는 부르디외에 비해, 이반 일리치는 거기서 더 나아가 ‘학교 없는 사회’(1970)에서 아예 탈(脫)_학교 사회를 전망하고 있다. 일리치가 보기에 교육과 과학기술과 종교를 포함해 모든 기존 제도는 인간의 소외를 낳기 때문이다.
21세기에도 학교가 없는 사회는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일리치 같은 이상주의자가 아니더라도, 지금처럼 학교가 아이들을 옭아매지는 않는 사회를 그려볼 수는 있다. 우선 지금까지 학교에서 받던 수업을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을 통해 집에서 받는 원거리 교육이 등장할 것이고, 더 나아가 멀티미디어를 통한 자기 교육이 평생토록 가능해질 것이다.
사람들은 인터넷 게임이나 CD롬을 통해서 혼자 배우게 될 것이다. 교육은 점차 ‘교육오락(edutainment)’으로 변할 것이다. 즉 가상 세계 안에서 인터랙티브 게임을 통해 놀면서 배울 수 있을 것이다. 많은 유럽어에서 ‘학교’를 뜻하는 말이 ‘놀이’나 ‘여가’를 뜻하는 그리스어(skhole)에서 왔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 교육의 오락화를 주도하는 사이버 공간은 본래의 의미에서 학교이기도 하다.
가까운 미래에 초등학교가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가족의 테두리를 벗어난 사회화의 시발점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국가가 개입하는 초등 교육은 아이들에게 사회성을 길러주는 공간으로 기능할 것이다. 초등학교에서는 지식의 습득 못지 않게 인성 교육, 사회 교육이 중시될 것이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중등 학교는 사라질 수도 있을 것이고, 남아 있는 중등학교도 대개는 국가의 간여에서 벗어난 사교육 기관이 될 것이다.
우리는 이미 ‘학급 붕괴’라는 이름으로 근대적 학교가 몰락하는 과정을 목격하고 있다. 지난 세기 70년대 이후에 등장한 미니스쿨운동, 대안학교 운동 같은 것은 탈_학교 사회로 가는 시발점이었는지도 모른다. 지식의 중요성은 점점 더 커질 것이므로 교육의 중요성도 점점 더 커지게 되겠지만, 그 교육은 학교라는 물리적 공간과 분리될 수 있을 것이다. 일리치가 꿈꾸었던 학교 없는 사회는 얄궂게도 그가 혐오했던 기계 문명 덕분에 가능해질 것 같다.
■대학교육과 시장
유럽 대륙의 대학교들은 종교 계통의 일부 사학을 빼놓으면 대체로 국공립 대학들이다. 그래서 학비는 없거나 매우 저렴하다. 정부는 교육 예산 때문에 재정이 빡빡해 늘 힘들어하지만, 학생들은 재능만 있으면 얼마든지 공부할 수 있는 셈이다. 반면에 미국은 사립 대학 중심이고, 공립 대학이라고 하더라도 학비가 만만치 않다.
일본이나 한국의 경우 가장 우수한 학생들을 빨아들이는 것은 국립대학들이지만, 몇몇 경쟁력 있는 사립대학들이 있다. 국립대학의 수업료(등록금)는 사립대학의 수업료에 비해 싸지만, 유럽의 국립 대학에 견주면 매우 비싼 편이다.
지금 한국 대학의 국공립과 사립 이원체계는 좌파에게도 우파에게도 만족스럽지 않다. 좌파는 한국의 대학이 유럽식의 국공립 일원체계로 가기를 바랄 것이다.
원칙적으로 대학입학 자격시험에 합격한 학생이 자신의 주거지에 따라 어떤 학교든 원하는 국공립 대학에 갈 수 있는 유럽 시스템을 도입하면, 학교 사이의 우열이 줄어들고 학생들의 입시 부담과 학부모의 교육비 부담이 현격히 줄어든다. 그것은 교육의 기회균등이라는 측면에서도 바람직하다. 물론 이 경우에 교육세는 크게 증가할 것이다.
이에 반해 우파의 대안은 국립 대학을 민영화하고 수업료의 수준을 대학의 자율에 맡기는 것이다. 이것은 경제적 측면에서 교육에 접근한 것이다. 서울대학교를 포함한 국공립대학들이 민영화하고 수업료를 대학들이 자유롭게 정하게 될 때, 이 대학들의 수업료는 지금보다 크게 뛰어오를 것이다.
특히 서울대학교의 수업료는 크게 뛰어오를 것이다. 서울대학교에서 공급받을 수 있는 서비스(교육)의 질이 한국에서 가장 높을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이 방식을 지지하는 경제적 자유주의자들(이를테면 소설가 복거일씨)은 그것이 사회 정의에도 부합한다고 주장한다.
예컨대 서울대학교 학생들은 다른 대학 학생들에 견주어 집안이 유복할 가능성이 높고(부모의 경제적 능력이 학생의 학업 성취도에 영향을 끼칠 수 있으므로), 또 이 대학 학생들은 미래에 상대적으로 더 많은 수입과 더 위엄있는 직장을 가질 확률이 매우 높다.
그렇다면 서울대학교의 수업료가 사립대학의 수업료보다 싼 것은 여러 모로 불합리하다. 잠재적 소득이 높고, 더 나은 질의 서비스를 받고 있는 학생들에게 국고의 보조로 낮은 수업료를 받는 것은 사회의 저소득계층에게 세금을 걷어서 (잠재적) 고소득 계층에게 나눠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국공립대학의 민영화 방식은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난 뛰어난 재능들에게 충분한 기회를 주지 못할 위험이 크다. 그리고 이것은 기존의 계급구조를 인정하는 것이다.
시민들의 조세저항을 정부가 이겨낼 수 있다면, 유럽식의 국공립화가 교육의 기회 균등이라는 점에서 이상적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지금 같은 이원체계보다는 국립대학의 민영화와 그에 따른 수업료의 자율화가 더 나을 수도 있다. 시장의 가격기구가 늘 최선은 아니지만, 그것은 적어도 합리성의 근처에는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종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입력시간 2000/05/02 1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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