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동부 광나이성(省)의 ‘디엔 니엔’ 초등학교의 운동장 한 가운데에는 커다란 추모비가 있다. 대형 비석에는 ‘1966년 9월10일 남조선 군대에 의한 희생자’라는 제목 아래 사망자 112명의 이름과 나이를 빼곡히 적어놨다. 지난달 22일 오전 1번국도 선상에 있는 광나이 시내에서 비포장도로를 따라 20㎞ 떨어진 이 시골학교를 방문했을 때 베트남 어린이들이 운동장 한켠에서 고무줄 놀이를 하고 있었다. 한 어린이는 “어른들에서 이야기를 들었다”면서 추모비의 의미를 잘 아는 듯했다.이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디엔반현(縣) 디엔증사 하미마을에서는 2일 월남참전전우복지회(이사장 김문구)를 주축으로 한 33명의 한국대표들과 지역 주민들이 모여 전쟁희생자 위령제와 위령비 기공식을 가졌다. 주민들은 전쟁 당시 청룡부대원들에 의해 137명이 희생됐다고 주장하고 있다. 베트남측 전사(戰史)에는 국군이 수십여 지역에서 5,000명 이상의 민간인을 사살했다고 적고있다.
베트남 전쟁 참전사에서 우리가 치부라고 생각하는 부분은‘양민학살’논란이다. 일단 양민학살이 ‘기정사실’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한국전쟁이 끝난지 50년이 지난후에 다시 부상한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과 마찬가지로 이 문제는 언제든지 폭발, 한국과 베트남의 관계에 찬물을 끼얹을 수도 있다.때문에 참전용사들이 위령비를 세우는 등 과거의‘잘못’에 대한 사과노력은 한-베트남 관계에 긍정적으로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그러나 민간단체의 이같은 움직임이 베트남인들의 민족감정을 자극, 오히려 양국 관계발전에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우려도 만만찮다.
특히 최근‘양민학살’문제가 불거지면서 현지 교포들의 입장이 아주 난처해졌다. 이순흥(李順興) 전 호치민 한인회장은 “확인되지 않은 과거 문제가 핫이슈가 되는 바람에 생업에 지장이 있을 정도”라고 말했다.
‘양민학살’문제는 전쟁이라는 특수상황에서 불가피한 측면이 있었고, 피해규모가 확대 과장됐다는 주장도 만만찮다. 숙명여대 최동주(국제학) 교수는 “전쟁 당시 한국군은 시종일관 선무공작의 대상이 됐다”면서 “당시 한국 참전을 반대했던 미국 좌파 학자들의 현지조사를 보더라도 최근 일각에서 주장하는 피해규모는 과장됐다”고 말했다.
베트남 정부도 풀리기 어려운 이 문제에 대해 일단 함구령을 내렸다. 호치민의 한 언론인은 “한국 언론의 보도를 인용한 ‘투오이쩨’등 일부 신문에 대해 보도자제 요청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물론 베트콩과 양민을 구분할 수 없었던 베트남전쟁 특유의 상황논리가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일방의 주장을 실체인 것처럼 의미를 부여하는 것도 바람직 하지 않다. 전쟁 당시 사이공주재 한국대사관 영사였던 안희완(安熙完)씨는 “이같은 문제는 캄보디아를 공격한 적이 있는 베트남 스스로도 자유로울 수 없다”면서 “우호증진만이 유일한 과거청산의 길”이라고 말했다.
이동준기자
djlee@hk.co.kr
■[베트남과 따이한] 아직도 계속되는 '고엽제 전투'
전쟁이 한창이던 1970년 7월 중순 베트남 중부 퀴논 지역의 정글 위로 UH60 헬기 한 대가 미세한 흰색 액체를 쏟아붓기 시작했다.
“미군이 또 제초제를 뿌리는군” 살인적인 무더위 속에 매복근무를 서고 있던 청룡부대 최용인(崔容仁) 일병은 군복에 달라붙은 가루를 털어내며 투덜거렸다. 그러나 그는 지금 지방의 한 보훈병원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죽음을 기다리고 있다.
종전 25주년을 맞았지만 수많은 참전자들이 ‘고엽제 병마’와 끝나지 않은 전투를 하고 있다. 1993년 2월 ‘고엽제 후유증 치료 등에 관한 법률’이 시행된 뒤 올 1월까지 국가보훈처에 피해신청을 한 참전용사는 5만5,230명. 이들 중 2만6,183명이 고엽제 피해자로 등록됐고 1만7,149명이 비해당 판정을 받았다.
나머지 1만1,897명은 검진이 진행중이다. 고엽제 환자는 크게 후유증과 후유의증으로 나뉘는데 후유증은 고엽제와 직접 연관이 있다고 밝혀진 12종의 질병을 앓고 있는 2,974명의 환자가 해당된다.
그러나 피해자들은 보훈당국의 판정과 처우에 대해 불만을 갖고 있다. 특히 후유증으로 ‘의심’되는 21종의 질병을 앓고 있는 후유의증 환자들은 후유증 환자에 준하는 대우를 해 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에 대해 국가보훈처는 후유의증 환자의 절반 이상이 고혈압 당뇨 등 일반 질병의 환자인 점을 강조, 이들을 똑같이 대우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피해자들은 국내 피해인정 기준에 문제가 있다고 반박하고 있다. 1991년부터 25만명의 피해자들에 대한 정부차원의 역학조사를 벌였던 미국과는 달리 한국은 1995년에야 첫 역학조사를 실시, 미국의 기준을 답습하고 있다.
환자들은 “고엽제 노출 정도가 다르고 인종학적 특수성이 있는데도 미국이 인정한 질병만 인정한다”면서 “이 때문에 지금도 피해자들이 혜택을 못받는 경우가 허다하다”고 주장한다. 전쟁의 상처는 아직도 이들의 몸에 뿌리깊게 남아 있는 셈이다.
■[배트남과 따이한] 참전 전투수당 달라
“피의 대가를 돌려달라”
대부분 참전용사들은 요즘도 ‘브라운각서’를 언급하며 당시 지급받은 각종 수당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다. 브라운 각서는 미국이 참전 한국군에게 전투수당 등 군사비 지원을 약속한 협정이다.
최근 비밀해제된 이 각서의 군수사항 10조에는 ‘전·사상 발생시 한미합동위원회에서 합의한 비율의 2배를 준다’고 적혀 있지만, 참전용사들은 실제 수령액이 너무 적었다고 믿고 있다. 당시 국군은 같은 계급의 필리핀 호주군은 물론이고 월남군 보다도 적은 수당을 받았다. 그러나 미국이 참전 한국군에게 구체적으로 얼마를 지불했는지는 여전히 비밀로 분류되고 있다.
1967년부터 2년간 파병됐던 최신호(崔信鎬·56)씨는 “미국에서 한국군 하사에게 월 1,300달러씩 지급했으나 손에 쥔 것은 57달러 뿐이었다”면서 “나머지는 국내에 송금돼 경부고속도로 한국중공업 한국비료공장 등을 짓는데 써졌다”고 주장했다. 간혹 참전전우회 등 관련단체가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경부고속도로를 점거하는 것도 이같은 역사적 동기와 관련이 있다.
■[베트남과 따이한] 경제득실효과
“민병대를 모집하겠다”
베트남 파병이 실행되기 이전인 1964년 3월 총리를 역임한 김현철(이후 주미대사)씨는 사무엘 버거 주한 미국대사가 ‘전투병 참전은 한국의 유엔 가입에 장애가 된다’며 난색을 표하자 이같이 제안했다. 미 국무부가 최근 비밀해제한 대화록에서 확인된 이 내용은 당시 한국 정부가 참전에 얼마나 적극적이었는지를 보여주는 일단에 불과하다.
한국의 베트남전쟁 파병은 안보 보다는 경제 논리가 작용했다는 게 학자들의 대체적인 견해다. 정부가 미국과의 협상과정에서 시종일관 파병의 대가를 요구, 경제적 이득확보에 총력을 기울인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1970년 2월24-26일 열린 미 상원 대외안보공약소위원회(일명 사이밍턴청문회)에서는 참전 한국군을 ‘피의 보상을 노린 용병’으로 폄하하기도 했다.
그러나 베트남전쟁 참전이 우리 경제에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국군은 주월사령부가 직접 봉급을 관리, 1972년까지 2억달러 이상을 송금했고 이중 40%는 저축됐다. 전쟁이 지속되면서 전사나 부상자에 대한 보상금도 늘어 1972년까지 6,500만달러가 지급됐다. 대개 농촌출신이었던 연 31만명의 군인 송금은 경제적 파급효과 뿐만 아니라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심감을 심었다.
미국의 상업적 특혜는 서비스 건설 등의 한국업체들과의 계약을 통해 이뤄졌다. 물품수송 세탁소 유흥업 등 서비스업체는 한때 50여개 이상, 건설업체는 최다 12개사가 공사를 진행했다. 1972년까지 이들 업체가 벌어들인 외화는 2억3,800만 달러나 됐다. 한국이 1965-72년 참전의 대가로 얻은 이익은 총 10억3,600만 달러이다. (표 참조)
그러나 참전이 경제적으로 긍정적 결과만 낳은 것은 아니었다. 참전으로 정부와 일부 기업간의 밀월관계가 고착화돼 ‘월남재벌’들이 탄생, 오늘날의 재벌 중심 산업구조의 고착화로 이어졌다. 또 전쟁특수가 일본과의 국교정상화(1965년)와 겹치면서 대일 무역의존도를 심화하는 계기가 됐다. 베트남전 초기 한국의 주요 수출품인 철강제품 화학비료 기계류 등의 주요 공급자는 일본이었다. 전투병력 참전으로 얻은 한국의 경제적 이익은 단지 병참기지 제공 역할만 했던 일본 대만 등과 비교하면 아주 적었다. 노무라(野村)연구소의 자료에 따르면 일본은 1965-67년 단 3년간만 22억 달러의 외화를 벌었다.
/이동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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