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 독자들에게 ‘문학’이 의미하는 것은 대체로 현대 문학, 그것도 동시대의 문인들이 쓴 소설이나 시다. 중고등학교 시절 교과서에 실린 고전 문학 작품들을 시험 공부 삼아 읽기는 했겠지만, 그것들은 졸업과 함께 대개 기억에서 지워져 버린다. ‘관동별곡’이니 ‘어부사시사’니 하는 제목들만 어렴풋이 남게 될 뿐이다. 그리고 그들이 좋아하는 현대 문학의 큰 부분은 외국의, 그것도 서양의 현대 문학이다.대학의 국문과 안에서는 현대문학이 고전문학이나 국어학에 견주어 ‘덜 학문적인 것’으로 푸대접받는다지만, 대학 바깥의 일반 독자들과 고전문학 사이의 거리, 특히 우리 고전문학 사이의 거리는 머나멀다. 그 거리를 반영하듯, 문학 관련 잡지들도 대개 현대문학 작품들과 관련돼 있다. 그래서 일반인들이 문학에 대해서 얘기한다고 할 때, 그 문학은 현대의 문학작품들이나 비평문을 가리키기 십상이다.
1991년에 창간된 반연간지 ‘민족문학사연구’는 그런 현대문학 일색의 담론 공간에서 예외적으로 우리의 고전 문학에 눈길을 주어왔다. 이 잡지를 펴내는 민족문학사연구소는 1990년 4월에 출범한 진보적 국문학 연구자들의 모임이다. ‘민족문학사연구’는 11호까지 제작·공급을 창작과비평사에서 맡았고, 98년 상반기의 12호부터는 도서출판 소명에서 떠맡고 있다.
‘민족문학사연구’는 비평 전문지를 포함한 여느 문학잡지에 비해서 언뜻 덜 재미있어 보인다. 새롭게 발굴된 작품이 아닌 한, 문학 작품이 실리는 것이 아니라 문학 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논문과 비평이 실리기 때문이다. 또 작품이 실린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현대어로 돼 있질 않으니, 연구자들의 도움 없이 독자들이 그것을 읽어내기도 어려울 것이다.
말하자면 ‘민족문학사연구’에 실리는 글들은 거의가 각주가 더덕더덕 붙은 글들이다. 그리고 그 각주는 독서의 리듬을 종종 끊어놓는다. 그러니까 ‘민족문학사연구’는 처음부터 독자들을 살갑게 대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런 무뚝뚝한 첫 인상에 개의치 않고 이 잡지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서양문학·현대문학의 홍수 속에서 우리가 잊고 있던 민족의 문학 유산을 새롭게 발견하는 기쁨을 누릴 수 있다.
올초에 나온 제15호만 해도 그렇다. 15호는 ‘조선후기 서사문학사의 시각’이라는 제목의 특집 아래 네 편의 글을 묶어놓았는데, 독자들은 그 특집을 통해서 기억 속에 제목만 희미하게 남아있는 조선 후기 전기소설(傳奇小說)들의 양상과 의미를 곁눈질하게 되고, 이희평이라는 19세기 야담 작가를 사귀게 되고, ‘장화홍련전’에 등장하는 여성 인물들이 그 당시의 남성지배 사회를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지를 엿보게 된다.
‘민족문학사연구’를 읽는 것은 학교 교육을 통해 언뜻 제목만 들어본, 또는 제목조차 들어보지 못한 우리의 고전 문학 작품의 세계를 산책하는 것이다.
그러나 ‘민족문학사연구’의 대상이 좁은 의미의 고전문학에 한정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잡지가 다루는 대상은 시간적으로 신라의 향가에서 일제하 최남선·홍명희의 작품까지 1,300여 년에 걸쳐 있고, 계급적으로 귀족(양반)문학에서 여항문학·민중문학을 아우르며, 표기 수단에서 한문학과 향찰문학과 한글문학을 싸잡는다.
해방 이후의 문학은 잘 다루지 않지만, 12호에 실린 구재진씨의 ‘민족문학론_화두를 지키기 위하여’라는 글은 젊은 작가 배수아씨를 거론하고 있다. 제13호에 실린 조성면씨의 ‘탐정소설과 근대성’이나 신동흔씨의 ‘PC 통신 유머방을 통해 본 현대 이야기 문화의 단면’ 같은 글은 ‘민족문학사연구’가 대상으로 삼는 작품들이 그 시간대만이 아니라 성격까지 대단히 유연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조씨의 글은 김내성의 두번째 탐정소설 ‘비밀의 문’(1949)을 분석한 뒤, 탐정소설이 타락한 시대의 타락한 대응방식이며 안정된 삶을 희구하는 근대인들의 욕망이 투여된 현대의 로망스라는 결론을 얻는다. 또 신씨의 글은 PC 통신 유머방에 올라온 이야기들을 살핀 뒤, 설화의 재창출을 통한 풍성하고 건강한 이야기 문화의 회복은 실제적 이야기판보다는 사이버 이야기판을 통해서 실현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물론 이런 글들은 ‘민족문학사연구’의 주류를 이루는 글은 아니다. ‘민족문학사 연구’가 고전문학만을 다루는 것은 아니지만 그 중심은 고전문학에 있고, 이 잡지의 본령은 고답적 대상에 대한 고답적 접근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여기서 ‘고답적’은 욕이 아니다. 가볍고 날랜 것이 상찬되고 있는 시대에 ‘민족문학사연구’의 묵직함_책이 물리적으로 무거운 것은 아니다_과 둔함은 그 자체만으로도 하나의 미덕이라고 할 만하다.
■창간사
민족문학은 민족의식에 바탕을 두고 민족의 생활 현실과 생활 감정을 민족적 예술형식으로 표현한 문학이다. 우리가 ‘민족문학사연구’를 발간하는 뜻은 민족사의 요구에 부응하는 학술연구의 일환으로 우리 문학 일반을 민족문학의 시각에서 연구하자는 데 있다.
참다운 민주주의의 실현과 자주적 통일이라는 이 시대 우리 민족의 과제를 해결하고 민족사를 진전시키는 데 본연구지가 학문적 차원에서 일정한 기여를 하게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런 뜻에서 우리는 한국의 고전문학과 현대문학, 남한문학뿐만 아니라 북한문학까지도 민족문학적 관점에서 새로이 점검하고 평가하는 작업을 추진해나가고자 한다.
고종석 편집위원
aromach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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