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은 왜 바흐를 좋아할까?/차윤정 지음, 중앙M&B 발행범람하는 식물도감 들을 훑다보면 허탈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꽃 사진도 예술적이고, 개화시기·꽃말·원산지·용도 등에 대한 정보도 풍부한데 끝까지 읽지를 못한다. 책에 나오는 어떤 꽃도 우리와 이야기를 나누지 않기 때문이다. 하물며 꽃에 대한 관심이 일종의 사치로 여겨지는 요즘에야.
‘식물은 왜 바흐를 좋아할까?’는 꽃과 식물과 자연에 대한 우리의 무지와 편견을 섬뜩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드러낸 책이다. 토마토에 바흐 음악을 틀어주면 토마토가 많이 열린다는 ‘바흐 효과’를 선전하기 위한 책이 결코 아니다.
지금은 처참하게 진 목련이나 흐드러지게 핀 철쭉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고, 두 차례나 화마(火魔)가 휩쓸고 간 강원 고성 산골짜기에도 반드시 소나무 어린 싹이 돋아날 것임을 믿게 만드는 그런 책이다.
책은 먼저 식물이 철저한 모계중심 사회라는 도발적인 주장부터 편다. 봄바람을 타고 날아드는 수많은 꽃가루들의 기원이 정확히 어딘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종자들간에도 다양한 아버지를 가지고 있다는 이 사실, 이로 인한 유전적 다양성으로 인해 식물은 태고적부터 번성해왔다는 저자의 주장이 솔깃하다. 저자가 서울대 산림자원학과와 동대학원에서 산림생태학을 전공한 여성 연구원(현 서안환경설계연구소 연구원)이기 때문일까?
이러한 편견은 여지없이 깨져버린다. 저자가 열거하는, 모계사회에서 막중한 임무를 띤 암꽃에 대한 식물의 배려는 셀 수 없을 정도이다. 소나무의 예. 소나무의 암꽃은 주로 활력이 좋은 위쪽 가지에 달린다. 반대로 아래쪽 가지에는 주로 수꽃이 달리는데 이는 이동이 가능한 수꽃으로 하여금 척박한 환경을 떠나 보다 나은 환경에서 짝을 찾도록 한 나무의 배려이다.
식물도 사랑을 하고 오르가즘을 느낀다는 주장도 있다. 백합의 암술머리는 처음에는 건조한 상태로 있지만 꽃이 성숙함에 따라 점차 촉촉해지다가 꽃가루가 묻으면 점액의 양이 증가하는데 심한 경우에는 이슬이 맺히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벌이나 나비에 의해 꽃가루받이를 하는 식물도 일단 꽃가루를 받으면 금세 향기가 사라지고 꽃잎 역시 시들고 만다. 책상 위에 놓여있는 노란 프리지어 꽃의 향기는, 결국 벌을 만나지 못한 꽃의 설움이 뿜어내는 향기라는 것이다.
식물의 모성애도 감동적이다. 자신의 열매에 대한 염려가 오죽했으면 밤나무는 열매 바깥으로 사나운 가시들을 잔뜩 만들어 놓았을까. 게다가 강인한 외피와 더불어 속옷까지. 그것들은 어미가 한 해 동안 벌어들인 노동으로 말미암은 것이며 이로 인해 모체는 심각한 영양장애를 앓다가 다음 해에는 단 한 개의 열매도 맺지 못한다는 사실. “어느 해 유독 밤이 많이 열리면 다음 해에는 안 열린다”는 시골 노인들의 말이 이유가 있었다.
물론 바흐 효과도 언급한다. 식물은 저음의 묵직한 소리가 만들어내는 바흐의 오르간 음악을 좋아한다는 실험결과를 제시한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저자는 바흐의 음악을 우리네 모내기타령이나 김매기가락으로 연결시키는 혜안을 번뜩인다. 음조가 단순하고 낮게 깔리는 이 노동요야말로 어린 벼에게 위안과 자극을 주는 바흐의 음악이라는 것이다.
책은 이밖에도 붓꽃에 얼룩무늬가 있는 것은 곤충을 끌어들이기 위한 식물의 유혹이고, 산사나무의 가시는 열매를 쪼을 새의 부리가 겨우 들어갈 정도로 촘촘하게 배열돼 있으며, 소나무의 솔방울은 열기에 쉽게 터져 씨앗을 뿌리기 때문에 산불이 난 산을 제일 먼저 개척하는 일꾼이라는 사실 등을 쉴 틈 없이 전한다.
산에 핀 철쭉의 색이 왜 도심의 진달래보다 진한지(산속에는 경쟁을 해야하는 다른 꽃들이 많다), 목련과 개나리, 진달래 등은 왜 잎보다 먼저 꽃을 피우는 지(빨리 종족을 번식시키기 위해서) 등도 알게 해 준다. 책이 단지 식물의 사생활에 관한 에세이를 넘어, 생물 다양성 보존이라든지 환경보전에 대한 최적의 입문서로 읽혀지는 이유이다.
끝으로 저자가 전하는 우리의 무지 하나. 온실에서 자라는 화초는 주인이 매일 쓰다듬으면서 “잘 자라”라고 소곤대면 정말로 때 이른 꽃을 피운다고 한다. 하지만 과연 주인의 보살핌에 은혜를 갚기 위한 것일까. “사실 나무에게 사람의 손길은 무척 큰 스트레스이다. 그래서 빨리 꽃을 피우고 죽기로 작심한 것이다. 꽃에 대한 사랑은 죽은 자에 꽃을 바친 네안데르탈인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아직까지 꽃에 대한 인류의 사랑은 짝사랑이다.”
김관명기자
kimkwmy@hk.co.kr
입력시간 2000/05/01 1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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