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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다시본다](3) 북한의 개전 목표와 서울 점령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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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다시본다](3) 북한의 개전 목표와 서울 점령전략

입력
2000.05.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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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은 왜 서울서 3일을 허송했나?신 복 룡

(건국대 교수, 한국정치외교사학회장)

simon@kkucc.konkuk.ac.kr

南정권전복 수도점령 목표도발, 미군 참전하자 전면전 확대된것

결과적으로 볼 때 김일성(金日成)의 개전은 그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실패한 전쟁이었다고 한다면, 우리는 하나의 원초적인 질문에 부딛히게 된다.

그것은 김일성의 개전목표는 무엇이었을까 하는 점이다. 한국전쟁에 대한 김일성의 개전 의지를 논의하면서 남한의 우익사회는 논의의 여지도 없이 그가 남한‘전역’을 무력으로 공산화하려고 했다고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사태를 면밀히 검토해 보면 김일성은 당초부터 전면전을 획책했다고 믿기는 어렵다.

김일성의 개전 의지를 전면 남침으로 설명하는 과정에서 제일 먼저 부딪히는 의문은 왜 그가 서울의 장악에 그토록 몰두했을까 하는 점이다.

당시 서울은 남한의 7사단(의정부 방면)과 1사단(문산방면)이 지키고 있어서 북한군으로서는 서울을 장악한다는 것이 그리 수월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서울을 주공(主攻)목표로 삼았다.

물론 서울이 남한의 수도이므로 서울이 제일 공격목표였으리라고 쉽게 생각할 수 있으나 김일성의 서울점령작전은 그보다 더 깊은 뜻이 있었다.

그러한 개전목표와 관련하여 한국전쟁의 수행과정에서 나타나고 있는 최대의 수수께끼는 그 중요한 초전의 3일동안 북한군은 왜 남진하지 않고 3일을 서울에서 허송했는가 하는 점이다.

이와 관련하여 ‘북한군이 모스크바 또는 베이징(北京)측에 다음 행동방향을 상의하기 위해서였다’는 증언(딘 러스크)이 있으나 당시 북한군이 남한 전역의 점령이냐 또는 서울만의 점령이냐와 같은 중요한 작전계획(grand design)은 이미 개전 전에 결정된 것이지 서울을 점령한 이후에 소련으로부터 작전지시를 받았으리라고 보기는 어렵다.

공병과 통신을 소홀히 함으로써 피치 못할 전략상의 공백에 따른 3일간의 휴식이었다는 증언(스타니코프)도 설득력이 부족하다.

그렇다면 그 깊은 뜻이란 무엇일까? 북한군으로서 서울에 최초로 진주한 부대는 3사단 9연대로서 그 시간은 27일 오후 11시였다. 그리고 곧 이어서 4사단이 진주했다. 이들이 3일(27~29일) 동안에 서울에서 한 일은 요인의 납치와 이를 통해 남북협상의 우위를 장악하기 위한 정치공작이었다.

서울이 남조선의 심장이므로 이곳을 장악하게 되면 전국토를 장악하는 것이나 다를 바가 없으며, 거기서 남조선 국회를 소집하여 대통령을 새로이 선출하고 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 정부가 통일이 되었음을 세계 만방에 알리면 어느 외국도 자신을 간섭·침범하지 못할 것이라고 김일성은 생각했다.

전쟁의 초기과정에서 제기되는 또 하나의 의문은 인민군이 왜 서울의 남쪽에 있는 수원의 장악을 중요시했는가 하는 점이다.

그것은 오산비행장을 장악함으로써 남한의 공군력을 무력화시키려는 의도 이외에 서울에 있던 정부 요인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적어도 개전 당시의 김일성의 점령 목표에는 수원 이남이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서울이 점령되면 이승만(李承晩)대통령이 항복하리라고 그는 확신했다. 러시아를 지배하기 위해 나폴레옹이나 히틀러가 하바로브스크까지 점령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김일성이 진실로 남한 전역을 장악하려 했다면 북한군 2사단과 7사단의 병력은 홍천에서 남진하다가 서쪽으로 우향하여 수원을 공격할 것이 아니라 계속 남진하여 횡성·원주·제천·단양·영주를 거쳐 민중 봉기와 연고가 깊은 대구를 장악했어야 옳았다.

김일성이 장기적인 전면전을 통하여 남한 전역을 장악하려고 했다고 보기에는 병참과 보급에도 많은 문제점을 보여 주고 있다. 인민군에게는 서울 이남의 지도가 지급되지 않았으며 다만 37도선인 평택까지 나와 있는 5만분의 1 지도를 지참하고 있었다.

남침한 뒤 지역행정을 관할할 내무서원들의 사전 준비교육도 없었다. 또한 서울을 점령한 6사단에게는 국군과 맞닥뜨려도 접전을 피하라는 방호산(方虎山)사단장의 지시가 있기도 했다. 일선부대의 장비는 대체로 경장비였고, 보급도 2~3일분에 지나지 않았다.

이런 점에서 볼 때 인민군이 서울 점령 3일째인 7월 1일에 미군이 참전하고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길로 접어들게 되자 다시 남진을 시작함으로써 6·25는 제한전에서 전면전으로 확대되었다.

북한군 작전국장 유성철(兪成哲)의 증언에 따르면, 한국전쟁은 당초 3일의 전쟁이었다. 이것은 3일 이내에 서울의 점령을 끝낸다는 김일성의 주장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베이징을 방문한 북한 군사고문단에게 마오쩌둥(毛澤東)도 단기전을 권고했으며, 평양에 주재하던 소련 군사고문인 바실리예프 장군과 포스트니코프 장군도 7월의 우기를 걱정하며 6월말에 개전이 불가피하다고 권고했고 김일성도 이에 동의했다. 장기전을 획책했다면 7월의 우기는 당연히 겪어야 할 일이지 걱정할 사안이 아니었다.

북한이 서울에서 3일을 체재한 또 다른, 그리고 결정적인 이유는 전면적 남진이 미국에게 참전의 구실을 줄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참전 여부는 스탈린과 김일성의 중요한 화두였다.

이에 대해 확신이 없었던 스탈린은 당초 김일성의 남침계획에 마음 내키지 않았고 따라서 이를 신중히 처리할 것을 충고했다.

스탈린이 초기에 남침을 만류한 이유는, 미군 또는 일본이 군사적으로 개입할 가능성이 있으며, 남침은 미국이 소련을 모함하는 호재가 될 수 있으며, 북한의 군사력이 압도적으로 우세하지 못하며, 남한의 경찰과 군대가 강하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미국의 참전에 대한 우려로 인해 김일성은 수원 이남으로의 남진을 결행할 수가 없었다. 김일성은 1950년 5월에 베이징을 방문했을 때 합석했던 마오쩌둥은 미국이 개입하지 않도록 ‘남한의 영토를 조금 남겨두라’고 충고했다.

북한군이 서울에서 3일을 허송한 문제와 관련하여 중요한 문건이 있다. 개전 이튿날인 6월26일에 스탈린은 ‘북한군이 계속 남진할 것인지 아니면 거기에서 머물 것인지에 관하여 귀관의 보고서는 언급이 없다.

나의 생각으로는 공격은 절대적으로 계속되어야 한다’는 전문을 김일성에게 보냈다. 그 문맥으로 볼 때 김일성이나 스탈린은 남한 전역의 군사적 점령을 고려하지 않았다. 전국토의 완전한 정복을 획책하는 내전은 없다. 내전은 수도의 장악과 정치 지도자의 신병 확보를 통해 정국을 주도하려는 전술일 뿐이다.

그렇다면 어쩌다가 북한군은 전면 남침으로 전략을 바꾸게 되었는가라는 마지막 의문이 남게 된다. 북한군이 한강 도하작전을 전개하기 시작한 것은 6월 30일 오전부터였다. 그들은 당초부터 도강을 계획하지 않았고 도강장비도 갖추고 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미군의 참전이 결정되고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들어서자 김일성은 자책과 후회 속에 남진을 계속하는 외에는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인민군은 막대한 인명 손실을 입고서야 7월 1일부터 남진을 시작했다.

그날은 미 지상군 24사단의 스미드부대가 부산에 상륙한 날이었다. 북한군은 당초부터 한강의 도강이나 폭파에 유념하지 않았다. 북한이 당초부터 남한 전역을 장악하겠다는 작전을 세웠다면 한강 도강장비를 갖추지 않았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옹진반도는 한국의 골란고원

◆옹진반도와 서해 5도

북한이 서울을 점령하기 위한 교두보로서 옹진을 그토록 중요시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지리적으로 보면, ‘옹진은 남한이 북한을 침략할 때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이지 북한이 남한을 공격할 때는 의미가 없다’고 주장하면서 옹진 전투는 남한이 도발했을 것이라고 커밍스는 암시하고 있지만 이는 전혀 사실과 다르다.

옹진반도는 남한의 서해안을 바라보는 후두부(喉頭部)여서 옹진 일대에 배치되어 있는 남한군 2개 연대를 격파하면 3일 이내에 서울을 점령하는 것은 매우 용이하며 2개월이면 남한을 적화할 수 있다고 김일성은 판단하고 있었다. 김일성은 1949년 8월 당시에 적어도 옹진반도만이라도 점령할 것을 스탈린에게 타진하고 있었다.

그러나 옹진반도를 장악하는 작전은 전략적인 성공을 거둘 수는 있지만 미군의 참전을 유발함으로써 정치적으로는 많은 것을 잃게 되리라는 것이 소련의 판단이었다.

그러한 소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일성은 옹진의 중요성을 깊이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스탈린을 만나 한국전쟁을 검토할 당시의 의제는 다름 아닌 ‘옹진작전’이었다. 적의 급소는 나의 급소이다. 옹진반도는

‘한국의 골란고원’이었다. 골란고원은 시리아와 이스라엘에게 모두 중요한 곳이지 이스라엘에게만 중요한 요충이 아니다. 뿐만 아니라 이곳을 북한이 점령할 경우 전선의 길이가 38선보다 3분의 1로 줄어들어 든다는 점을 김일성은 중시했다.

옹진과 서해 5도에 대한 UN군의 입장은 휴전회담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즉 휴전회담에서 UN군은 당시의 전선인 와이오밍선(Wyoming Line: 현재의 휴전선과 비슷한 선)을 넘어서 ‘한국의 허리’라고 할 수 있는 평양―원산선까지 진격하거나 그러지 못할 바에는 차라리 와이오밍선에서 휴전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따라서 휴전회담 당시에 UN군측은 옹진반도를 포기하고 그 이남에 휴전선을 설정하고 싶어했다. 와이오밍선을 돌파하면서 겪어야 할 피해가 클 뿐만 아니라 그렇게 되면 서부전선이 갑자기 확장되어 그만큼 전력의 소모가 필요했으므로 1951년 6월의 전선은 서울과 인천을 포함할 수 있는 최단거리의 전선이었다는 점을 UN군은 선호했다. 공산군측에서 보더라도 옹진 연안 개성 일대가 함락되면 평양의 함락을 걱정해야 하므로 이곳은 저항도 그만큼 컸다.

다음은 8일자(월)에 ‘미국의 개입과 전쟁주도’

한국일보.한국정치외교사학회 공동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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