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色)은 욕망의 세계이다. 삶은 언제나 욕망으로 가득하기에 색을 드러내는 일은 곧바로 삶을 드러내는 일인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2000년. 천단위의 숫자가 바뀐다는 이유만으로 무엇인가 새로운 일이 일어나야 할 것 같은 2000년.28일 개막한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는 새로운 시작으로 ‘탈색’을 선택했다. 개막작으로 상영된 홍상수 감독의 세 번째 영화 ‘오! 수정’은 흑백이다. 그의 흑백은 탈색일까, 아니면 또다른 모노크롬을 뒤집어 쓴 것일까.
그의 영화는 시간과 공간을 분할해 왔다.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선 불륜과 살인이라는 선정적인 주제를 ‘시간’이라는 변수로, ‘강원도의 힘’에서는 알려진 ‘공간’을 다시 인수분해했다. 이번엔 ‘시점(視點)’이다. 시점은 계급과 욕망을 반영한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처녀를 옷벗겨 침대에 눕히기까지 길고 지루한, 비틀스의 노래 ‘Long And Winding Road’처럼 쉽지 않은 여정을 코믹한 대사로 변주했다. 5개의 장으로 구성됐다.
방송작가인 수정(이은주), 그와 함께 일하는 PD 영수(문성근), 미대를 나와 화랑을 운영하는 재훈(정보석). 영수가 제작비를 지원받기 위해 수정을 동반해 재훈을 만나면서 재훈과 수정의 관계는 시작된다. 1, 2장은 재훈 시점으로 본 수정과의 만남, 3, 4장은 수정 시점이며, 5장은 제3자 시점.
얼핏 회귀적이고 반동적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많은 사람들은 이 시대 ‘처녀’에게 ‘처녀성’을 요구하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한다. 감독은 한 처녀의 ‘처녀 상실사’를 ‘처녀 거래사’로 표현했다. 냉소적인 감성이 곳곳에 드러난다.
1장 첫 만남에서 재훈은 PD와 수정에게 그냥 밥을 먹으러 가자고 말하지만, 수정 시점에서 반복되는 만남 장면에서는 기사에게 점심값을 건네주는 재훈의 모습이 나온다. 수정에게 그는 돈 많은 남자였다. 수정은 재훈이 자신의 가슴을 더 쉽게 만질 수 있도록 그가 샤워를 하러 간 사이 브래지어를 풀어두지만 막상 그가 좀 더 은밀한 행위를 하려 하자 그에게 유혹적인 한마디를 던진다. “저 처음 이예요.”
처녀가 처녀 아닌 세상에 처녀가 처녀라는 것은 대단한 부가가치를 지닌다. 시트를 적신 수정의 처녀혈을 보고 감개무량한 재훈. “네가 싫어하는 것 목숨 걸고 고칠께.” 이 대사를 통해 감독은 처녀성과 허망한 약속을 등가물로 평가한다. 둘 다 쓰레기 같다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두 인물의 시점을 통해 보여지는 동일한 상황의 반복은 변주에 그 묘미가 있다. 1, 2악장과 3, 4악장에서의 반복과 차이는 결국 인생의 진실과 허위가 종이 한 장 차이라고 말한다.
흑백화면은 흔한 일상의 공간에 대한 소격효과(낯설어 보이기)를 유발하며 오히려 반복되는 두 이야기의 차이에 더욱 주목하게 만든다. 욕망이란 오히려 흑백으로 더욱 쉽게 드러난다.
그것은 영화적 화려함으로부터의 탈색이자, 동시에 감독의 허무주의적 세계관에 의한 변색이다. 감독의 이런 말하기 방식은 칸영화제 ‘주목할만한 시선’에 그를 두 번째 진출시켰다. 호프집에서 재훈이 수정에게 키스하는 사이 포크가 짤각하고 떨어지자 재훈이 “포크예요”하고 말하는 장면에서 관객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암묵의 세상에 던지는 그의 코믹한 호명(呼名)은 이런 식으로 대중을 호객한다.
첫 경험을 갖는 전주국제영화제에서 첫 경험을 다룬 영화를 선택한 것은 방식에서나 주제에서도 제법 잘 맞아 떨어진 선택이었다.
전주=박은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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